근원을 잊었다
매년 대규모 아트페어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전시가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주변에는 작가도 많다. 수많은 갤러리가 있고 기획자와 큐레이터가 있어 작가와 관객을 연결한다. 모두가 좋은 작가이고 좋은 작품인데 무언가 빠진듯한 느낌이 있다. 그들이 정말 모두 작가일까. 갤러리일까. 숫자는 많아 보이는데 정말이라는 의문이 드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 수많은 작품 중 어느 작품이 좋은지 나와 잘 맞는지 찾기도 어렵다. 관객은 작품을 선택하기 어렵고 작가는 작품을 판매하기 어려워한다. 그러다 보니 좋은 작품이 팔리는 것인지 인기 있는 작품이 팔리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좋은 작품이라는 기준조차 모호하니 더 어렵다. 작품을 선택할 때 작품성과 대중성을 고려한다고도 한다. 그런데 작품성이란 무엇인가 어디에 기준을 맞추어야 하는가. 관객의 입장에서 작품성의 기준은 무엇으로 하는가. 일 년에 몇 번씩 했다는 전시경력인가, 여기저기서 받은 수상 경력인가 아니면 어느 대학 출신일까.
예술 작품을 보면 볼수록 그 기준조차 흔들린다. 수많은 평론가의 글이 실리고 수많은 작가의 작품이 전시장에 걸리지만 그것을 보고 평가하며 자신의 소장품으로 인정하기까지 과정은 어디에 남아있는가. 결국 누군가의 조언에 따르고 어디선가 자료를 토대로 구입하는 그렇지 않으면 오직 자신의 주관적 관점에 따라 선호도에 따라 구입하는 것인가.
얼마 전 지역의 아트페어에 작고 작가의 사후판화가 전시 판매되었다. 천만 원이 넘는 서너 작품은 전시가 되자마자 팔려나갔다. 그런데 그 작품은 작가의 진짜 서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작가의 사인이 복사되어 프린트된 것이었다. 왜 그렇게 비싸게 팔렸을까. 누군가 마음만 먹으면 프린트해서 판매할 수도 있는 그런 프린물을 말이다. 의문이었다. 그런데 수백 점이 넘는 작품 중에는 몇십만 원 몇백만 원 작품도 있다. 유독 고가의 그 작품만 빠르게 팔린 이유. 그것은 분명 작가의 유명세일 것이다.
예술 작품으로 가득한 전시장에서 비어있는 것 같은 마음이 이는 것은 아직 자신의 기준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가치 기준에 맞지 않는 작품들이 많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수많은 작가와 작품이 난무하고 판매되고 하지만 결국 오랫동안 관객에게 남아있는 작품은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보는 작품의 가치, 작품의 예술성은 결국 그 영역을 주도하는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흘러나오는 여론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하늘을 찌를 듯이 오르던 작품이 어느 날 바람처럼 사라져 버리고 세상의 이목에서 벗어나는 사례는 이미 세월을 거치면서 많이 경험하지 않았을까. 어느 날 100대 작가라고 하여 전집으로 묶어 나오던 작품들이 수십 년이 지나지 않아 작가의 이름조차 잊을 정도로 뒤안길로 물러나고 지금은 소수 몇몇의 작가만이 거래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한 시대의 흐름을 간파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술은 마음을 따뜻하게도 하지만 가치의 재화가 동반되는 이상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오늘 예술 작품 속에서 공허한 마음으로 작품을 바라보는 것도 또한 그런 영향이 아닐까. 저 작품 좋다고 하지만 뭐가 좋은지, 그렇게 말하는 이는 작품을 얼마나 소장하고 있을까. 수많은 큐레이터가 작품을 소개하지만 재화라는 것을 빼고 나서도 그 거래라는 것이 성립할 수 있을까. 있다면 어느 정도 일까. 1%, 10% 아니면 0.001% 정도일까. 예술품은 있는데 무엇인가 비어있는 느낌. 그것이 현재다.
202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