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영일의 인왕산 산행기
인왕산이라 하면 호랑이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다. 풍수지리적으로 경복궁의 우백호에 해당되며, 실제로도 조선시대에는 호랑이가 많았던 산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인왕산 호랑이 이야기가 여러 차례 등장한다. 호랑이가 경복궁 내전까지 들어온 적도 있고, 왕이 직접 인왕산으로 호랑이 사냥을 나가기도 했다.
조선 건국 초기부터 인왕산은 수많은 사연을 품을 산이었다. 특히 무학대사기 이 산에 올라 새로 건설할 수도의 터를 살폈다는 전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당시 실세였던 정도전의 주장에 따라 궁궐의 주산은 북악산으로 결정되었지만, 인왕산은 풍수지리적 가치와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곳이다.
그로부터 600여 년이 지난 지금, 인왕산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의 풍경은 완전히 달라졌다. 호랑이는 사라졌지만, 고층 빌딩이 가득한 세계적인 도시로 변모했다.
이 산을 찾는 이들도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로 다양해졌다. 무학대사가 지금 이 광경을 본다면, 호랑이보다 파란 눈과 금발의 이방인들을 더 신기하게 여겼을지도 모른다. 최근 K-등산이 인기를 끌면서 인왕산을 찾는 외국인들도 점점 늘고 있다.
일요일 오후, 경복궁역 1번 출구를 나와 인왕산 방향으로 향한다. 오월의 따가운 햇살과 도로 위를 타고 올라오는 열기에 여름이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한참을 걸어 인왕산 아래에 이르자, 가장 먼저 호랑이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호랑이 모양의 동상 받침석에는 "청와대와 경복궁을 지키는 호랑이"라는 문구와, 꼬리 쪽에는 "인왕산에 호랑이가 돌아왔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호랑이가 인왕산의 상징이며, 수호신처럼 여겨지고 있다는 사실이 다시금 느껴진다.
호랑이 머리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오르니, 한양도성을 따라 이어지는 등산로가 나타난다. 계단길을 오르내리는 사람들로 붐빈다. 성벽 옆 등산로를 따라 걷기 시작하자 등에 햇살이 내리쬐고, 금세 등줄기가 축축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조금 더 올라가자 저 위쪽 바위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언듯 보기에도 저기가 첫 번째 쉼터이자 서울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조망터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늘은 없지만, 우선 저곳까지는 쉬지 않고 올라보자고 마음을 다잡는다. 곧 바위에 이르러, 사람들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맞춘다.
맑은 하늘 아래 명동 일대의 고층빌딩들과 남산타워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남산 뒤편으로는 청계산과 관악산이 아스라이 보이고, 남동쪽으로는 롯데타워가 시야에 들어온다.
서울 도심을 항공사진처럼 내려다볼 수 있는 이 장면은 외국인 관광객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다.
물 한 모금 마시며 방금 전 걸어온 한양도성 길을 눈으로 더듬어 본다. 성벽은 중간에 빌딩 숲 속으로 사라지지만, 남산까지 이어진 도성을 마음속으로 그려본다.
도시의 풍광을 실컷 즐긴 뒤, 북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인왕산의 정상 모습이 눈앞에 나타난다. 거대한 바위덩어리가로 이루어진 봉우리, 그 남쪽 사면에는 넓게 펼쳐진 치마바위가 위풍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무학대사가 이 바위의 기세에 반해 인왕산을 조선의 주산으로 삼으려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인왕산 아래에 살았던 겸재 정선 또한 이 바위를 화폭에 담았다.
1751년 음력 5월 3일, 사흘 동안 이어지던 비가 그친 뒤 정선은 절친한 벗 이병연(李秉淵)을 문병하러 갔다가, 운무 속에 드러난 인왕산을 보고 그 그림을 그렸다. 친구의 쾌유를 기원하며 그린 그림이었지만, 이병연은 며칠 뒤 세상을 떠났다. 친구는 떠났지만, 이 그림은 국보 제216호로 지정되며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성벽을 따라 잘 정비되어 있다. 봉우리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워 보이지만, 나무 그늘 하나 없이 땡볕을 온몸으로 받아야 하는 구간이라 걱정부터 앞선다.
잠시 나무계단길 내려오고 다시 성벽을 따라 언덕을 오르기 시작한다. 햇살은 뜨겁지만,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어온 산이라 기꺼이 걸음을 옮긴다.
마침내 정상에 도달하니, 많은 이들이 남쪽을 향한 바위에 앉아 서울 시내를 감상하고 있다. 자연이 아닌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풍경이지만, 그 아름다움은 결코 뒤지지 않는다. 아래로는 경복궁과 청와대도 한눈에 들어온다. 북악산을 주산으로 삼고 정남향으로 지어진 경복궁은 조선 오백 년 역사의 중심이었다. 풍수지리적으로 인왕산은 경복궁의 우백호에 해당한다.
만약 무학대사의 주장대로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경복궁이 이곳 치마바위를 등지고 지어졌다면, 조선의 역사는 달라졌을까? 그러나 정도전은 "임금은 남쪽을 향해 앉아서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근본"이라며 북악산을 주산으로 삼을 것을 이성계에게 청했다.
결국 이성계는 정도전의 손을 들어주었고, 경복궁은 지금의 위치에 세워졌다.
나는 풍수를 맹신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에 올라 경복궁과 청와대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무학대사와 정도전의 논쟁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히 다가온다.
곧 있을 대통령 선거를 통해 국민으로부터 선택받은 새로운 정권이 들어설 것이다.
다음 정권은 어디에 머물게 될까? 그대로 용산에 남을까. 세종으로 천도를 할까. 아니면 다시 이 인왕산의 기운을 받는 곳으로 돌아오게 될까. 인왕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함께 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