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족산은 흔히 '닭발산'이라 불린다.
산 모양이 닭발을 닮았고, 한자로 닭 계(鷄)와 발 족(足)을 따서 지었기 때문이다.
닭은 12 간지 중 10번째 동물로, 태고적부터 인간과 함께하며 계란까지 선물해 주었다. 조금 우스갯소리 같지만,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어느 정치인의 말처럼 닭은 새벽을 알리는 시계 역할도 해 왔으니, 인간에게 꼭 필요한 가축이었다.
닭은 사시사철 맨발로 다니면서도 동상이나 무좀에 걸리지 않는다. 처음부터 조물주가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간혹 강아지에게 신발을 신긴 모습을 볼 때면 "원래 강아지도 애초부터 맨발로 다니도록 태어난 동물일 텐데...."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오래전 나이키가 아프리카에서 신발 팔아먹는 마케팅에 관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맨발로 다니던 원주민들에게 신발을 공짜로 나눠주었고, 그 결과 발바닥에 굳은살이 없어지고 피부가 얇아져 신발 없이는 걷기 힘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그들도 신발을 살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인간의 발은 어떤 존재로 태어났을까. 원시시대에는 모두가 벌거벗고 살았겠지만, 인류 문명이 시작된 뒤로는 신발을 신는 것이 당연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맨발 걷기가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맨발 걷기로 유명한 곳이 여럿 있지만, 그중에서도 계족산 황톳길을 으뜸으로 꼽는다.
최근 '월간 山 8월호'에 맨발 걷기 명소와 맨발 걷기를 통해 건강을 회복했다는 사례가 여러 페이지에 걸쳐 소개되었다. 맨발 걷기가 혈액순환을 개선하고 수면의 질을 높이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극찬이었다.
섭씨 35도를 넘나드는 폭염 속에서도 그 기사 하나가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이 더위에 나 말고 또 몇이나 올까?" 싶었지만, 막상 와보니 주차장이 이미 만원이었고 주변에도 차를 댈 자리가 없었다.
도로 한 귀퉁이에 빈자리를 찾아 간신히 차를 세우고 황톳길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오가는 사람들로 붐비는 좁은 길 양쪽으로 소주 광고 현수막이 여러 장 눈에 띈다. 일반적으로 산에서는 음주를 못하도록 단속하는 게 보통인데, 이곳에는 희한하게도 술 광고가 많다.
황톳길 입구에 다다르자, 여느 산과 다른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등산로 입구에 신발장이 여러 개 설치되어 있고, 사람들이 수도꼭지를 하나씩 끼고 앉아 발을 씻고 있다.
아마도 저 신발들은 황톳길 걷기 위해 벗어놓은 것이고, 수도꼭지 앞에 앉은 사람들은 걷기를 마친 뒤 발을 씻는 이들일 것이다.
대부분이 아프리카 원주민들처럼 맨발로 다닌다. 이곳에선 신발을 신고 다니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분위기다.
나도 신발을 벗어 들고 고운 황토를 살며시 밟아 본다. 처음 경험해 보는 새로운 촉감이 발바닥에 전해진다. 땡볕에 바짝 달궈진 해수욕장 모래 밟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촉촉한 질감이 발바닥으로 스며들고, 찌릿찌릿한 간질거림이 허벅다리를 지나 옆구리까지 살살 긁어주는 기분이다.
"발바닥이 얇아서 그런 걸까, 아니면 맨발 산행이 처음이라 그런 걸까." 다른 사람들은 잘도 걷는데, 나만 걸음걸이가 느리다.
더디거나 말거나 온몸이 간질간질해지는 오묘한 전율을 느끼며, 마치 황토를 음미하듯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걷는다.
진흙황톳길어느 구간은 황토에 물이 뿌려져 바닥이 반들반들해졌는데, 자칫 방심하면 훌러덩 자빠질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조금 더 걸으니 물기를 잔뜩 머금은 진흙길이 이어진다. 도예가들이 찰흙을 맨발로 꾹꾹 밟아 가며 치댄 것처럼, 수많은 발자국이 새겨진 황톳길이다.
중간중간 황톳길을 보수하기 위해 쌓아놓은 황토 무더기가 보인다. 누군가 흙더미를 이용해 예술작품을 만들어 놓았는데, 겨울 눈축제 때 눈을 조각하듯 진흙을 재료 삼아 앙증맞은 작품을 만들었다.
이곳 황톳길은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건강 그리고 멋진 추억까지 선사하는 대한민국 대표 명품 길임에 틀림없다.
짧은 거리도 아니고 14.5km에 이르는 거리를 왜 이토록 정성 들여 만들었을까. 궁금증이 생길 때쯤 황톳길이 탄생한 사연이 눈에 들어온다.
2006년 4월 어느 날 가까운 지인들과 계족산을 찾았던 조웅래 회장은, 하이힐은 신고 온 여성에게 운동화를 벗어주고 맨발로 돌길을 걸었다. 그날 밤 꿀잠을 잔 뒤로는 맨발의 첫 느낌을 잊을 수가 없었고, 더 많은 "사람들과 맨발의 즐거움을 나누자"는 마음으로 14.5km 임도에 질 좋은 황토를 깔기 시작했다.
"아, 입구에 소주 광고 현수막이 여러 장 걸려 있던 이유가 바로 이거였군...." 알고 보니 이 길을 만드신 분은 대전·충남지역에 기반을 둔 소주회사 회장님이었다.
발바닥이 화끈거릴 즈음, 세족용 수도가 나타난다. 수돗가에 걸터앉아 발을 씻고 신발을 신는다.
이제 황톳길은 그만 걷고 계족산성으로 올라가 보기로 한다. 데크길을 따라가니, 황톳길과 달리 더위가 확 몰려온다.
땀으로 등이 흠뻑 젖을 즈음, 계족산성으로 이어지는 임도 숲길에 도착한다.
여기서 계단을 통해서 700미터쯤 더 오르면 계족산성에 닿을 수 있다. 그런데 "산성 보수공사 중이라 갈 수 없다"는 현수막이 앞을 가로막는다.
"계족산성에 오르면 대청호와 대전시내 경치를 볼 수 있을 텐데...."
막히는 고속도로를 뚫고 여기까지 왔건만....
아쉽지만 "이 더위엔 안 가는 게 낫다."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임도 귀퉁이에 놓인 벤치에 앉아 시원한 얼음물로 목을 축인다.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하며 잠시 여유를 가진다. 땀이 식었을 즈음 자리를 털고 일어나, 출발점으로 돌아가기 위해 아래로 내려간다. 이번에는 계단 대신 임도를 따라 걷는다. 내리막길이라 조금은 더 시원한 느낌이다.
황톳길 초입 무른 흙과 달리 이곳은 딱딱하고 거칠다. 물을 뿌린 지 오래된 데다 건조한 날씨 탓에 황토가 딱딱하게 굳어버린 모양이다.
S라인 황톳길길바닥은 아래쪽 보다 못하지만, 사람들이 많지 않고 호젓하고 운치 있는 산길 분위기가 난다. 14.5km 전 구간을 걷기엔 부담스럽다면, 여기까지만 와도 계족산 황톳길의 느낌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을 것 같다.
계족산 우체통 근처까지 내려오니, 다시 사람들이 많아졌다. 여기를 기점으로 위쪽은 건조하고 한적한 황톳길, 아래쪽은 질척한 황토에 인파로 붐비는 길이다. 분위기는 사뭇 다르지만 나름의 매력이 있다.
아, 그런데 저건 또 뭔가?
닭을 애완견처럼 몰고 가는 사람이 있다. 가늘고 긴 막대기 하나로 닭 꽁무니를 툭툭 치면서 닭을 몰고 있다.
너무 신기한 광경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사진 찍느라 분주하다. 닭을 데리고 자주 오시는 분 같은데, 닭이 주인의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혼잣말을 하며 이리저리 몰고 가는 모습이 독특하다.
설마 닭이 사람 말을 알아들을 리야 없겠지만, 그 모습이 기이하여 핸드폰 카메에 담아본다.
계족산 홍보를 위해 누군가 의도적으로 연출한 상황인지, 정말로 닭 주인이 매일 닭과 함께 산책을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닭발산'과 잘 어울리는 흥미로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무더운 여름날 계족산에 오면, 이렇게 살아있는 닭발을 직접 볼 수도 있다.
계족산 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