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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제니 Sep 30. 2021

14일간의 자가격리

집순이니까 괜찮아



집순이니까 괜찮아


처음 14일 동안 자가격리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걱정보다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그것은 나에게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합당한 이유로 14일이라는 시간 동안 오로지 혼자 방 안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이다.


나는 이번 기회로 다시 한번 다이어트를 하고자 했다. 그래서 바깥 외출을 할 수 없는 14일 동안 먹을 식량을 한국에서 미리 챙겨갔어야 했지만 그러면 짐이 너무 많기도 하고 귀찮기도 해서(?) 정말 아무것도 챙기지 않았다. 정 배가 고프면 집주인분께 부탁해 장을 봐달라고 하면 되니까.



자가격리 숙소는 어떻게 구했을까?


나는 출국이 확정되자마자 다음 카페 우밴유(https://cafe.daum.net/ourvancouver)와 네이버 워킹홀리데이 카페(https://cafe.naver.com/gocan)를 통해 열심히 자가격리를 할 수 있는 숙소를 찾아봤다. 제일 처음 생각한 것은 개인 화장실이 있는 마스터룸이었는데 당시 방이 별로 없기도 했고 또 자가격리는 안 된다는 곳도 많아 숙소를 구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차선책으로는 에어비앤비를 통해 집을 아예 통째로 빌리는 것이었는데 그러기에는 비용이 상당히 부담이 되었다.


그래서 역으로 자가격리를 할 수 있는 숙소를 구한다는 글을 쓰고 기다렸다. 얼마 후 내 글에 댓글이 달렸고 원하면 장도 봐줄 수 있다는 말에 별 고민 없이 그 분과 계약을 했다. 나이대도 나와 비슷한 여성분이었기 때문에 더 신뢰가 갔다.



캐나다의 써리


캐나다 밴쿠버에 도착한 첫날 자가격리 숙소로 이동해 짐을 풀고 잠깐 숨을 돌리자마자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아무래도 여기까지 오기까지 일도 많았고 바짝 긴장을 하고 있었던 터라 긴장이 완전히 풀리면서 몸도 마음도 너무 피곤했다.


다시 잠에서 깼을 땐 다음날 새벽 무렵이었다. 새벽 5시였던가? 방 안에 멍하니 앉아 아직 어둠이 내린 바깥 하늘을 멍하니 쳐다봤다.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는 별 어려움 없이 시차 적응을 완벽히 했다는 것이다.


날이 밝은 후 창문 밖으로 보이던 써리의 동네 분위기


내가 자가격리를 한 곳은 '써리' 에 있었다. 사실 써리는 우범지대로 많이 알려져 있는 곳인데 어차피 자가격리를 하는 동안 나는 밖에 나갈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내가 직접 본 써리의 모습은 우범지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평화로워도 너무 평화로운 이 동네. 여기도 저기도 다 사람이 사는 곳이었다. 산이 보이고 물이 흐르고 하늘은 맑고 식물들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비록 방 안에서 보고 느낀 점이지만 결론적으로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써리에서 사건 사고가 많이 일어나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의견이므로 혹시 밴쿠버에 올 일이 있다면 스스로 잘 판단하여 지역을 선택하길 바란다.


써리에서의 세 번째 날


자가격리 3일 차. 첫날은 잠과 함께 두 번째 날은 인천공항에서 지인 언니가 챙겨준 간식으로 보내다가 세 번째 날이 되었을 때 집주인분께 장보기를 부탁했다.


식빵과 우유, 그리고 바나나. 장보기 리스트를 받은 집주인 언니가 정말 이것만으로 충분하냐고 걱정스레 물었지만 당시의 나는 별로 입맛이 없었기 때문에 충분하다고 답했다. 게다가 애초에 자가격리 기간 동안 최대한 덜 먹으며 다이어트를 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하루에 한 끼만 먹을 생각이기도 했다.



고마운 언니들


지인 언니가 챙겨준 간식 꾸러미


자가격리 4일 차. 날카로웠던 신경이 안정을 찾자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배고픔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간식 꾸러미에서 간식을 꺼내 먹고 점심때가 되면 식빵과 우유를 먹으며 버텼다. 저녁이 되어 또다시 배가 고파지면 식빵을 한 조각 더 먹거나 우유를 한 잔 마시거나 바나나를 먹었다. 활동량이 거의 없어 이 정도만 먹어도 배고픔은 진정이 됐고 나름 버틸만했다.


집주인 언니가 사다 주고 간 버거킹


자가격리 5일 차. 사람이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먹으니 집주인 언니가 걱정을 했다. 그녀는 내가 간식 꾸러미에서 프로틴 바를 꺼내 먹는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럴 만도 했다. 결국 그녀는 나의 자가격리 5일 차가 되던 날 나에게 더 필요한 것이 없느냐 물었고 근처에 버거킹이 있는데 잠깐 들려 햄버거를 사다 줄까 하고 물었다. 사실 무언가 자극적인 맛이 그리워지던 참이었다. 덕분에 5일 만에 속세의 맛(?)을 볼 수 있었다.


집순이니까 괜찮아?


자가격리 6,7일 차가 되니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안 나가는 것과 못 나가는 것의 차이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매일 창 밖으로 보이는 평화로운 캐나다의 풍경은 자꾸만 나를 밖으로 불러내는 것 같았다. 일주일 내내 먹은 식빵과 우유는 이제 너무 지겨웠고 못 봤던 드라마 정주행도 끝난 지 오래였다. 방구석에 앉아 영어공부를 하는 것도 한계였다. 이미 한국에서 모두 봤던 인터넷 강의를 다시 보는 일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의 드라마를 다시 보는 것처럼 영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다이어트는 제법 효과가 있었다. 덜 먹으니 확실히 살이 빠졌다. 다만 운동을 하지 않아 팔과 다리가 겨울날의 비쩍 마른 나뭇가지 같았지만 가장 스트레스였던 뱃살이 쏙 들어가 늘 입고 싶었던 크롭티를 입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신이 났다.


집주인 언니의 선물, 불닭볶음면


하지만 사람의 습관이라는 것이 참 무섭다. 항상 스트레스를 받으면 먹는 것으로 풀었던 나는 집주인 언니가 아무런 대가 없이 그저 선의로 베푼 라면에게 시선이 갔다.


한 번 먹기 시작한 라면은 도저히 끊을 수가 없었다. 밍밍한 맛에 질려 자극적인 맛이 필요했던 나는 캐나다에 도착해 처음 먹은 불닭볶음면을 시작으로 자가격리가 끝날 때까지 매일매일 다른 종류의 라면을 하나씩 먹었다. 정말이지 너무 맛있었다.


이후 남은 일주일을 버틸 수 있는 장보기를 부탁했고 집주인 언니는 내가 부탁한 것 이상을 해주었다. 코스트코에 들렸을 땐 맛있는 스콘 2개를 추가로 주었고 음료수와 과자 등을 별도의 비용 없이 제공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피자를 사다 준 적도 있었고 스시와 사시미, 빙수를 사다 준 적도 있었다. 알게 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언니에게 이렇게 과분한 친절을 받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그녀는 나를 굉장히 신경 써주었다. 게다가 그녀는 내가 부탁한 음식 외의 비용은 일제히 받지 않았다. 한국에만 천사가 있는 줄 알았더니 캐나다에도 천사가 있었던 것이다.



나가고 싶었는데 안 나가고 싶어 졌습니다.


자가격리 12일 차. 이전까지만 해도 창 밖의 풍경을 보며 당장이라도 뛰쳐나가서 밴쿠버를 즐기고 싶었는데 격리 해제의 날이 다가올수록 그럼 마음이 사라졌다. 다시금 떠오르는 힘들었던 기억이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어차피 나는 영어도 못하고 여기서 나간다고 한들 자괴감만 늘어갈 것 같은 생각에 덜컥 두려워졌다. 한편으로는 캐나다 워킹홀리데이가 끝날 때까지 이러고 살아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건 10일 차 즈음 캐나다로부터 격리 확인 전화를 받은 후부터였다.


전화영어는 더욱 힘들었다. 코로나 증상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는 질문에 대뜸 Yes라고 답을 하게 되면서 결국 영어로 소통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상대가 알게 되었고 이후 한국인 통역사와 함께 셋이서 통화를 하게 되었다. 통화는 무사히 잘 마칠 수 있었지만 이번에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은 자기혐오로 돌아왔다.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 주제에 뭘 어쩌자고 캐나다까지 온 거야, 나는.


자가격리 12일 차 써리의 밤



안전함과 이별할 시간


캐나다가 위험한 곳은 아니지만 영어로 인해 자꾸만 스스로를 혐오하게 되면서 영어를 쓰지 않아도 되는 자가격리의 시간을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마침내 자가격리가 끝나는 14일째가 되는 날에도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아마도 이때가 자신감이 완전히 바닥난 순간이지 않았을까 싶다.


자가격리 마지막 날


자가격리 마지막 날은 편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내일 나는 밖에 나갈 수 있을까? 나가면 뭐? 길을 몰라도 물을 자신이 없고 혼자서 카페에 갈 수도 없을 텐데. 바닥난 자신감은 이미 알고 있는 영어문장조차 입 밖으로 꺼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게 걱정만 가득한 채로 자가격리의 마지막 날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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