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면 아이들에게 자상한 엄마가 되어야지 했다가 사방에서 부르는 엄마라는 소리에 부엌으로 숨어버리고 말았다. 이러려고 애를 셋이나 낳은 게 아닌데, 경쟁하듯 부르짖는 목소리로부터 도망치고 싶다.
아이들이 등교를 하면 그새 조용해진 마음이 쓸쓸해져 식물에게 말을 건다. 물조리개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도망쳤던 자아를 찾으러 헤맨다. 가녀리게 붙어있는 라벤더의 시든 잎을 한 장 뜯으며 엄마를 찾던 외침에 다정하지 못했던 그 시간으로 되돌아간다. 아직도 엄마라는 역할이 익숙하지 않다. 언제 익숙해지는 걸까. 나의 자아 속에 엄마의 자리는 있는 걸까. 시든 잎을 모조리 다 뜯어냈지만 물음에 대한 답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아이들이 돌아오면 다정한 엄마가 돼야지 다짐만 할 뿐이다.
혼자 먹는 밥이 적적해서 드라마를 틀었다. <Breaking bad>라는 드라마를 보는데 사람들이 죽고 피가 튀고, 주인공은 암에 걸렸다. 밥만 잘 먹는다. 내 안에는 잔인한 장면에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는 무시무시한 내가 있다. 공감 능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또 다른 나 자신에 소름이 돋아 먹던 밥이 그제야 목구멍에서 걸린다.
책을 고르려 책장 앞에 섰다가 여기저기 대충 꽂혀 있는 책들이 눈에 밟혀 책장 정리를 시작했다. 안 읽는 책이나 다 읽은 책은 나눔을 할까 생각을 하다가 어떻게든 더 꽂아보려 테트리스를 하듯 책을 꽂아둔다. 아까 덜 먹은 밥 때문에 허기진 배를 책 욕심으로 채우려나보다. 정리를 하다 이내 자리를 잡고 책을 읽고 있다. 산만함도 자아라면 내 속에 도대체 몇 개의 내가 있는 걸까.
책에 쓰인 글자처럼 한 자 한 자 적어가며 나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좋겠다.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모든 것이 정해진 봐줄 만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리고 싶다. 혼란에 섞인 자아 속에서 진정한 나를 찾는 것보다는 누군가 만들어 놓은 자아에 들어가서 정해진 데로 예측 가능 한 삶을 살고 싶은 회피 본능이겠지.
만들어진 삶에서는 자유는 없는 게 아닐까.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아 분열은 계속 돼도 나대로 나답게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