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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nfonia Oct 11. 2022

스테레오타입만 남은 라플란드 여행

독일인 5명, 한국인 3명, 핀란드인 1명, 체코인 1명이 같이 떠났다

한국인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독일인 남자친구와 라플란드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데 혹시 관심이 있느냐고 물었다. 라플란드는 절대 혼자 갈 수 없는 곳이다. 그렇기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가겠다고 말했다. 나를 포함해서 독일인 5명, 한국인 3명, 핀란드인 1명, 체코인 1명이 모였다. 모두들 누구의 친구 또는 남자, 여자친구, 혹은 형제로 엮인 사이였다.


여행은 오로라가 가장 잘 보이는 때인 2월로 잡혔다. 2월부터 한참 전인 가을부터 숙소, 기차 티켓, 차 렌트까지 모든 일정이 착착 계획되었다. 라플란드를 이미 한 번 갔다 온 독일인 친구들이 모든 일정과 계획을 짰다. 나는 참말로 가기 전날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이 여행을 한 번 갔다 왔기 때문에 계획을 짰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한 번 스테레오 타입을 짚고 넘어가야겠다. 유럽에서도 독일인의 이미지는 이와 같았다.


분 단위로 계획을 짜는 계획 주의자

시간 약속도 철저히

짠돌이 짠순이

맥주만 마심

재미없음 등


이 모든 이야기는 건네들은 것이었다. 당시 나는 주변에 독일인 친구가 없어서 내 눈으로 목격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기차를 타고 우리의 목적지인 사리셀카(Saariselka)에 도착하자마자 독일인의 스테레오타입 대행진이 시작됐다.


우리는 중앙역에 모여서 8시간을 기차를 타고 산타마을이라고 불리는 로바니에미에 도착했다. 로바니에미에서 잠깐 마을을 둘러본 후 미리 예약한 렌터카를 타고 3시간을 또 가야 했다. 기차에서 아주 조그마한 샌드위치를 먹고 이미 8시간이나 지난 후였다. 그리고 눈 속을 헤치며 약 두 시간을 차를 타고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대형마트로 갔다. 사리셀카는 라플란드에서 유명 관광지이긴 하나 눈으로 뒤덮인 마을이기 때문에 대형마트를 쉽게 찾을 수 없다. 게다가 숙소는 통나무집으로 주변에 편의점 하나 없는 곳이었다. 대형마트에서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사야 했다.


이렇게 어둠과 눈발을 헤치고 가야했다. 운전에 능숙했던 독일인 친구들이 고마웠다.


여행을 계획한 독일인 멤버들은 이미 2월 한참 전부터 엑셀 시트를 공유했다. 주유비용부터 차 렌트비, 그리고 거기서 무엇을 먹고 사야 할지까지 기록된 파일이었다. 세상에서 계획 짜기를 제일 싫어하는 천하태평 극악 P형인 나는 그 파일을 간단히 무시했다.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았다. 거기서 해먹을 한국음식을 사 오라기에 김치 하나 덜렁 들고 왔다.


약 10시간을 거쳐 마트에 도착하자 독일인 멤버들은 엑셀 시트를 출력한 종이를 꺼냈다. 우리가 앞으로 일주일 동안 먹을 식량과 어떤 품목을 사야 할지 적힌 리스트였다. 다른 계획과 마찬가지로 나는 그들에게 모든 것을 맡길 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카트에 상품이 쌓이지 않았다.


종이에는 품목의 수량과 그람수 그리고 가격까지 적혀있었는데 그들은 그 리스트에 적힌 것과 정확히 똑같은 것을 골라서 카트에 담고 있었다. 가격까지 동일한 것을 보니 우리가 여러 대형마트 중에 특별히 그곳으로 간 것도 계획의 일부였다.


배고프고 지친 나와 한국인 친구는 빨리 장을 볼 셈으로 리스트에 있는 상품을 마구 집어 오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는 핫 초콜릿 파우더가 있었다. 네스퀵 파우더였다. 하지만 네스퀵을 찾을 수 없었고 북유럽에서 유명한 브랜드인 오보이로 골랐다. 전쟁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문제의 오보이. 오보이 맛있는데 왜 그래...? / 이미지 출처: 아마존


잠시 후 오보이 파우더가 카트에서 없어졌다. 그것은 네스퀵 파우더가 아니기 때문에 혹은 가격이 다르기 때문에 혹은 그들의 취향과 맞지 않기 때문에 탈락된 것이었다. 네스퀵 이후 우리가 재빠르게 채소를 골라와도 그들은 일일이 확인했다. 리스트와 맞는 상품인지가 무엇보다 중요해 보였다.


결국 우리는 마트에서 거의 3시간을 보냈다. 나와 친구는 지쳐서 마트에서 파는 샌드위치를 먹었다. 오보이가 아닌 네스퀵이어야만 하는 이유를, 대파 하나 고르는데 가격과 그람까지 중요한 이유를 그들에게 묻지 않았다. 피곤해서 도저히 물을 힘이 없었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보이는 풍경


어찌 저찌 숙소에 도착했다. 각자 짐을 풀기 시작했다. 우리에겐 맥주와 먹을 것이 있었고 이제 남은 일은 광란의 첫날밤을 보내면 되는 것이었다. 서로 아이스브레이킹을 위한 밤이랄까? 각자 전리품처럼 가져온 것들을 숙소 공용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당시 독일인 무리들의 평균 연령 약 26세. 테이블에 그들이 잔뜩 꺼내놓은 것은 하리보 젤리였다. 하리보 광고는 하이퍼리얼리즘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리보 광고에서 양복을 입은 아저씨가 '난 빨간색 곰이 제일 좋아'라고 말했다면 평균 연령 26세에 공대생이며 모두 180 센티 이상의 건장한 남자들은 '황금색 곰이 제일 좋아'라고 말했다. 황금색, 빨간색, 초록색 곰 젤리들이 테이블 위를 굴러다녔다. (이 와중에 젤리 덕후인 나는 곰 말고 다른 종류는 없는지 뒤적여봄)


그리고 맥주 파티가 이어졌다. 엄격하고 공평하게 계산을 하고자 하는 그들은 냉장고 앞에 종이 하나를 붙였다. 각자의 이름이 쓰여있었다. 자기가 마신 맥주 캔을 기록하는 종이였다. 바를 정자 대신 작대기가 하나씩 그어졌다.


우리가 묶었던 숙소. 눈이 저만큼 쌓이는 건 당연한 일이다.


광란의 파티 대신 보드게임이 시작됐다. 술을 마실 때 머리를 써야 하는 보드게임을 하는 유럽인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한국인, 나는 나가떨어졌다. 아니 정신이 또렷할 때 하는 게 게임 아닌가? 게다가 안주거리도 없이 맥주를 주야장천 마셔야 하는 자리였다. 더 많은 한국음식을 계획하지 못한 날 책망했다.


한국인 세 명이 독일인의 계획에 유일하게 참견한 것이 있다면 음식이었다. 한국인은 김치볶음밥, 카레, 떡볶이를 야심 차게 계획했다. 이쯤이면 한국인의 스테레오타입을 먹보라고 자신할 수 있겠다. 19세기 말에 조선인의 밥상을 보고 놀란 선교사들이 입을 모아 이렇게 말했다. 어린아이들도 성인만큼 먹고 밥을 한 사발 먹고도 모자라서 앉은자리에서 복숭아 열 개는 해치운다는 그 민족. 우리는 북쪽 나라에서도 먹보 민족의 혈통을 제대로 과시했다.


독일인 친구들이 계획한 식사는 생존 음식에 가까웠다. 알 수 없는 소스를 간신히 버무린 파스타와 그냥 빵과 또 빵... 그리고 치즈. 우리는 번갈아가며 음식을 만들었는데 카레, 김치볶음밥, 떡볶이를 맛본 그들은 우리에게 사과했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을 줄 몰랐다며 자기네가 한 음식이 형편없어서 미안하단다. 그래 알았으면 됐다.


그리고 먹보 한국인과 생존 음식을 만드는 독일인 사이에 낀 핀란드인 한 명이 있었다. 그는 우리가 떡볶이와 김치볶음밥을 먹으며 '대박'이라고 외칠 때마다 조용히 웃었다. 그는 그 장면이 낯설지 않았다. 일본에서 교환학생을 했을 당시 그가 본 일본인들도 음식을 입에 넣기도 전에 감탄사를 연발한다고 말했다. 핀란드인은 아무리 음식이 맛있어도 그렇게 표현하지 않는단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지막이 웃을 뿐인 그는 한국인과 독일인 사이의 비무장지대와 같았다. 무색무취로 어떤 의견도 크게 내세운 적이 없었다. 그것은 그의 성격이었을까 핀란드인의 스테레오타입이었을까?


정보가 없어서 추측할 수 없는 한 명이 있었다. 체코인마틴이었다. 처음에 그를 봤을 땐 딱히 친해지고 싶지 않았다. 빅뱅이론에 나오는 쉘든과 비슷했다. 특별한 의도가 없이 직설적으로 말을 했고 사실만을 나열했는데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영어도 어찌나 빠르게 말하는지 이미 외운 대사를 읊는 것 같았다. 그는 호탕하게 웃은 적이 없었고 설사 웃어도 입꼬리가 한쪽만 올라갔다. 항상 시니컬한 농담을 했다.


어느 날 독일인 무리가 저녁을 하는 순서였다. 그들은 저녁을 다 준비해놓고 우리를 불렀다. 나머지 사람들은 씻느라 조금 늦게 내려갔다. 그들은 허겁지겁 먹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우리를 위한 커틀러리와 접시 모두 없었다. 나는 항상 저녁을 만들었을 때(한국 음식은 내가 다 했다^^;;) 한 사람 씩 다 퍼서 주거나 커틀러리까지 완벽하게 준비해놓고 그들을 불렀다. 음식도 건장한 그들에게 더 많이 퍼주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엄마 같은 마음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하는 수 없이 커틀러리와 접시를 꺼내려고 봤는데 개수가 한두 개 모자랐다. 식기 대부분이 식기세척기에 들어가 있었다. 독일인 무리는 그 사실을 알고도 저녁을 먹기에 바빴다. 나는 남은 큰 접시들을 다른 친구들에게 주고 찻잔 밑에 받치는 접시를 쓰려고 했다.


그 순간 갑자기 마틴이 나에게 손을 뻗쳤다. "이리 줘, 거기에 먹을 순 없지"라고 말하더니 자신의 접시와 바꿔줬다. 그러더니 식기세척기에서 접시 하나를 꺼내 물로 대강 닦더니 자신은 그 접시를 쓰겠다고 했다. 슈퍼맨처럼 나타난 그는 다음 위기 때에도 큰 활약을 했다.


그 당시 나는 무릎 수술을 한 지 약 7개월 지난 시점이었다. 여전히 무릎 쪽이 시큰거렸다. 그래서 크로스컨트리를 하자고 했을 때 내가 잘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도 왕년에 상급자 코스에서 스키를 타던 시절을 생각하며 크로스컨트리를 하러 나갔다.


우리 무리 중에 유일하게 마틴이 크로스컨트리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었다. 나머지는 일반 스키보다 얇고  막대를 감당하지 못했다. 마틴은 크로스컨트리 주법을 알려줬지만 모두 어기적어기적 용만  뿐이었다. 또한 그곳은 스키장처럼 굴곡이 져있거나 언덕이 높지 않았다. 크로스컨트리는 온몸을 이용해서 평평한   위를  걸어야 하는 운동이었다. 모두가 양발과 양손을 지루하게 흔들고 있는 와중에 내리막길이 나타났다. 그들은 이제야 나타난 언덕에 소리를 지르며 활주 했다.


크로스컨트리는 아니고 산을 올라가서 찍은 사진. 무릎 넘어까지 눈이 쌓여있기 때문에 산을 올라갈 때에도 짧고 넓은 막대와 같은 장비를 차고 가야한다.


나는 겁을 먹은 채로 활주를 했다. 당연히 넘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일어날 수도 없었다. 예전의 나는 남자들하고 산에 올라가도 선두에 있을 만큼 체력이 좋았다. 어릴 때 막내 외삼촌을 따라 다녔던 스키장에서도 중상급자 라인에서 날아다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고작 이 작은 언덕을 활주 하지 못하다니. 이게 뭐라고 겁을 내다니. 나는 이제 여러 운동을 할 수 없는 사람인가. 주저앉은 채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눈물을 쏟아냈다. 그 순간, 슈퍼맨 마틴이 나타났다. 한 치의 변함없는 표정으로 나에게 자신의 폴을 건넸다. 나는 그 폴을 잡고 간신히 일어섰다.


그는 내가 왜 울었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위로의 말도 토닥여주는 따스함도 없었다. 여전히 그는 시니컬한 농담을 건넸다. 마치 내가 눈물을 터뜨렸다는 사실을 본 적이 없다는 듯 대했다. 크로스컨트리를 하기 전에 그에게 무릎 상태를 말했었는데 그는 괜찮을거라고 말했었다. 그게 미안해서 나를 이렇게 보좌하고 있는 건가. 누구보다 앞서서 활주 하던 그는 내가 넘어진 이후 내 뒤로 붙어다녔다.  


이보다 훨씬 강렬하고 색깔도 다양한 오로라도 목격했다. 나중에 핀란드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내가 운이 엄청 좋았다고 하더이다.


라플란드 여행은 지구에 사는 인간의 초라함을 확인하는 장이었다. 운이 좋게도 여행을 하는 내내 하늘이 맑았다.(*구름이 없는 날씨여야 오로라를 볼 수 있다) 숙소 앞에서도 영하 30도의 날씨에 어둠을 헤치고 간 언덕 앞에서도 오로라가 핑크, 보라, 파랑, 초록으로 물결을 뿜어내는 광경을 보았다. 그 앞에 선 우리는 평등했다. 키가 180센티가 넘는 독일인도 먹보 한국인도 비무장지대와 같은 체코인과 핀란드인도 거대한 자연을 목격하고만 작은 생물이었다. 국경, 인종, 문화는 그저 인간이 임의로 그어놓은 선일 뿐이었다. 인간으로 한데 묶인 우리는 같은 감정을 공유했다. 얼마나 우리가 작고 초라한가, 우리는 왜 이 사실을 자주 잊어버리는가. 하늘에서 유영하는 오로라를 보고 있자니 경외심보다 공포감이 들었다. 예기치 못한 자연재해를 맞이한 사람처럼 넋을 잃었다. 자연이 주는 거대한 선물도 재앙도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같았다. 무력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이었다. 오로라는 아름다움으로 위장한 경고의 메시지였다. 우리가 얼마나 무력하고 작고 초라한지 깨달으라며 하늘에 여러 빛깔로 써놓은 문구였다.


라플란드 여행이 끝나고 난 후 우리는 사진을 공유했다. 사진에 집착하는 나이지만 그 사진들의 대부분을 다운로드하지 않았다. 내 아이폰은 영하의 날씨를 견디지 못해 내가 찍은 사진은 별로 없었다. 고프로까지 가져온 그들이 찍어준 사진을 다운 받아야 추억을 몇 개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어떤 사진도 고르지 않았다. 나와 같이 간 이들이 그 추억을 공유하기에 여전히 먼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일주일이 넘는 시간을 같이 보냈지만 그 시간 속에서도 국가 간 경계는 분명했다. 독일인은 독일어로 한국인은 한국어로 이야기했다. 베를린 장벽만큼 높은 언어와 문화의 차이를 아무도 부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독일인을 한 프레임에 놓고 보았다. 그 프레임만 지우고 보면 각각의 인간을 탐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로라 앞에서 '우리는 모두 하나, 위아더월드' 라고 다짐했다가도 숙소로 돌아오면 다시 국가와 인종과 스테레오타입이라는 경계선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스테레오타입을 알지 못해 정의할 수 없었던 체코인 마틴만이 여행에서 특별한 사람으로 남았다.


  



썰매를 타러 올라가는 길. 내가 인생에서 타본 가장 재미있는 썰매였다. 언덕도 역대급으로 높았음.


2018.2.26 (여행 갔다 온 직후)

나는 자연 다큐멘터리나 캠핑 따위에 흥미가 없다. 게을러서 여행을 가도 4일 차쯤이면 늦게 일어나 그 도시에 사는 사람처럼 지낸다. 카페에 가고 일기를 쓰고 멍 때린다. 굳이 말하자면 나는 도시가 좋다. 그런 내가 눈의 왕국으로 떨어졌다.


크로스컨트리를 했고 장장 1.2킬로미터 슬로프에서 봅슬레이급 속도의 썰매를 탔고 허리 만치 눈이 쌓인 산을 올랐다. 나는 34도 여름에도 찬 물로 샤워를 하지 않는데 사우나 후 영하 20도에 입수를 했다. 그에 대한 보상이었는지 오로라를 세 번 보았다. 마지막엔 꽤 강렬하게 요동치는 물결을 목격했다. 낮에는 눈이 모래알처럼 빛났고 밤에는 무수한 별이 쏟아졌다. 자신의 몫을 해내는 것만으로 아름다운 존재들과 매일 마주했다. 가장 나 답지 않은 방식으로 신년을 보냈다. 나라는 사람의 둘레도 해가 갈수록 넓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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