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익숙해졌을까? 여전히 생경했던 핀란드의 여름
2019. 6
며칠 전 집 앞 공사장을 지나가는데 안전모를 쓴 이가 말을 걸었다.
"거긴 위험하니까 이쪽으로 걷는 게 좋을 거야"
낯선 이가 말을 거는 법 없는 이 동네에서 영어로 친절을 베푼 그가 고마웠다. 나는 고맙다는 말을 미소와 함께 실어 보냈다. 그러자 그가 대뜸 어디서 왔냐 물었다. 자기는 모로코에서 왔단다. 대학 때 한국인 친구가 있었다고 했다. 대학교에서 역사를 전공했다고 덧붙였다. "지금은 보다시피 배관공이지만 말이야"라는 말이 뒤따랐다.
내가 어떻게 반응할 새도 없이 그는 좋은 하루를 보내라는 말과 함께 공사장 안으로 사라졌다. 그가 내뱉은 그 문장이 서글퍼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펜스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작년 여름, 접시를 온종일 닦으며 잘 차려입은 직장인 무리를 바라보던 내가 떠올랐다. 그도 나도 무얼 감내하면서 이곳에 처절히 남아있는 걸까. 공사장을 지나 하늘을 보니 이제 시작한 핀란드의 여름이 생생했다. 이 하늘을 보고 싶어서 그토록 긴 겨울을 온몸으로 견뎌왔나 보다. 아무렇지 않게 웃고 말았다.
바다로 둘러싸인 집 앞을 산책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취미이다. 서울에서 산책하기 좋아했던 동네는 광화문 근처였다. 대학시절, 수업이 끝나면 신촌역에서 602번 버스를 타고 광화문으로 향했다. 교보문고에서 책 몇 권을 산 후 씨네큐브로 갔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보곤 했다. 그다음 서촌 쪽으로 빠져서, 아무 카페에 들어가서 교보문고에서 산 책을 읽고 일기를 한 바닥 씩 썼다. 마냥 그 근처를 배회하기도 했다. 나에게 산책은 단순한 걷기가 아니었다. 정신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소비하는 행위가 포함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산책이란 오로지 걷고 숨 쉬는 행위다. 겨울에는 날카롭게만 보였던 장대 같은 나무들을 바라보는 일이며, 파도가 없는 바다 대신 바닷바람에 철썩이는 나뭇잎들의 소리를 듣는 일이다. 찬란한 풍경이 본래 나와 상관없는 듯 매번 생경하다. 숲 속을 걷고 있는 내가 꿈속 모습은 아닐까 싶어서 서울을 떠올리려고 애쓴다. 서울 속 내가 진짜고 여기 있는 나는 어째 만들어진 것만 같다. 그런데 그렇게 그리운 서울 속에 내 모습이 그려지지가 않는다. 산책을 하다가 나에게 묻는다.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 매번 답을 하지 못한 채 산책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