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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nfonia Feb 02. 2022

아담과 이브가 되다 - 핀란드 사우나 체험기

사우나에서 옷도 벗고 부끄러움도 벗었네

2016. 9.


핀란드에 도착하고 약 한 달 지났을 무렵, 학교 학생회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핀란드 사우나 여행 공고를 보았다. 같이 갈 만한 친한 친구도 딱히 없고 의사를 물어보는 과정도 귀찮아 혼자 덜컥 신청했다. 선착순으로 단 20명 모집하는데, 내가 공고를 봤을 때 이미 며칠이 지나있었다. 되면 좋고 아님 말고 하는 마음이었다. 약 일주일 지났을 때, 연락이 왔다. 누군가 한 명이 급작스럽게 여행을 갈 수 없게 되면서 내가 당첨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워낙 혼자 잘 다니는 성격이라 여행 당일 아침까지도 별 걱정 없었다. 나처럼 혼자 신청한 사람도 있겠거니 하고 모이기로 한 버스 역으로 향했다. 그러나 도착하자마자 예술대에서 본 적 없는 남초 성비에 한 번 놀랐고,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백인이라는 사실에 두 번째로 놀랐다. 게다가 그들 대부분은 대강 아는 사이였다. 헬싱키에서 버스로 약 한 시간 떨어진 Sipoo (씨뿌)가 종착지였다. 씨뿌로 향하는 버스에서 홀로 남은 아시안은 음악 감상을 핑계로 창가만 바라보았다.


보통 핀란드에서 통나무집은 숲 속 한가운데 호수 앞에 덩그러니 있다


숙소는 자작나무가 빼곡한 숲 한가운데 호수 앞에 자리하였다. 학교 엠티라고 하면 강촌 구석, 노래방 기계가 있을 법한 원룸만 알고 있는 나로서, 학교 학생 단체가 예약한 숙소는 감동이었다. 회장에게 물어보니, 굉장히 유명한 건축가(알바 알토는 아니었는데 까먹었다)가 지은 건물이고 학교 소유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학생은 전통 사우나가 달린 통나무 집을 시중보다 싼 가격에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사우나를 마치고 풍덩 뛰어들 호수


숙소에 도착하자 예상대로 자기소개 시간이 왔다. 최종적으로 나는 스무 명 중 혼자 아시안, 예술대학원생, 자교생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공대생, 유럽인, 교환학생이었다. 또한 내가 제일 나이가 많았다. 알고 보니 여행을 주최한 단체는 우리 학교의 교환학생의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곳이며, 동시에 공과대학교 소속이었다. 그러므로 우리 학교 공과대학으로 교환학생을 온 유럽의 이십 대 초반 친구들이 다수일 수밖에 없었다.


이십 대 초반 혈기를 내뿜는 아이들은 자신의 기운을 이기지 못해 호수로 뛰어들었다. 대낮부터 사우나를 즐기기 시작했다. 나는 순한 인상을 가진 여자애들 두 명 사이에 끼어 숲 속을 걸어 다녔다. 사실 유럽인이라고 해도 자신의 몸을 오롯이 세상 앞에 보이는 일은 누드 비치 아니면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몇 명의 친구들을 제외하면 사우나에 쉽게 들어가지 못했다.


망설이는 뒷모습


이렇게 하염없이 창가만 바라보다가 나와 여성 동지 둘은 사우나에 들어가기로 결심하였다. 우리에게는 손바닥만한 비키니가 있었다.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가자 통유리로 된 한쪽 벽이 보였다. 우리가 굳이 왜 통유리 앞에서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가... 의문이었으나 어쨌든 비키니로 갈아입었다. 야심 차게 사우나 문을 열자마자 털이 성성한 다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남자아이들이 다 벗고 씻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나는 문을 닫아버렸다. 그들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하나, 둘 남자아이들이 걸어 나왔다. 그들의 중요부위에 다행히 수건이 걸쳐있었다. 나와 여성 동지 둘은 눈으로 결의를 다지고 정글 같은 사우나로 발을 들였다.


옆이 통유리이므로 밖에서 안이 훤히 보인다.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갔을 때 이미 이 상태였다. 내 팬티나 잃어버리지 않으면 다행.


문을 열자 뿌연 연기가 입과 콧 속으로 들어왔다. 이층으로 된 사우나에 남자아이들의 비쩍 마른 가슴팍이 켜켜이 쌓여있었다. 저 비좁은 공간에 우리가 앉을 자리가 있을까 하는 궁금증도 잠시, 사우나의 공간은 마술사의 호주머니처럼 무한으로 펼쳐졌다. 그렇게 다닥다닥 붙어 앉으니 이야기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양동이 바가지엔 맥주병이 쌓여있었다.


말이 유난히 많았던 독일 친구 하나가 꾸준히 유럽식 개그를 날렸다. 그들의 개그 코드를 이해하지 못했던 나는 사우나의 연기에 매우 감사했다. 입가의 경련은 커녕 우리의 중요 부위도 보이지 않을 사우나의 뿌연 연기 덕에 대화는 그럭저럭 잘 진행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그들은 어느 순간 내가 유일한 한국인이고 아시안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사실 나의 여성 동지 둘은 습식 사우나에 오히려 괴로워했고, 찜질방의 원조, 한국의 딸, 나만이 홀로 생존했다.


많은 남자들 사이에서 나만 시커먼 머리를 하고 검정 비키니를 입고 앉아있었던 것이다. 유럽 애들 대부분 한국 하면 북한만 떠올리는지라, 어느 하나가 시답잖게 김정은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오징어게임과 BTS에게 감사해야겠다. 2016년만 해도 한국 하면 북한 이야기 꺼내는 애들이 많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다른 하나가 한국에서 교환학생을 했다고 고백. 찜질방 이야기를 하면서 나에게 한국에 관한 질문 폭탄을 쏟아냈다. 나는 사우나 열기처럼 달아오르는 관심을 이겨내지 못하고 나왔다.   


대낮부터 사우나를 즐긴 4인방


나오니 다른 세상이었다. 숲 속에서 부는 바람, 그 속에 날 선 냉기, 자작나무가 머리를 흔드는 소리, 들어본 적 없는 새소리. 사우나에서 갓 뛰어나온 내 몸에선 장작 냄새가 났다. 사우나 밖에는 숲을 향해 벤치가 하나 있었다. 사우나에서 나온 아이들과 나는 그 벤치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별다른 그림이 필요하지 않았다. 때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밤이 되자 자작나무 대신 쏟아질 것 같은 별이 말없는 공기를 대신했다. 한편 사우나 안에선 저마다 희미한 조명에 기대어 이야기를 풀어냈다. 타인과 나의 경계가 사우나의 뿌연 연기만큼 흐릿해지는 순간이었다.


몇 번 안과 밖을 들락날락하다 보니 누가 수건을 걸쳤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어느 남자아이들은 보란 듯이(?) 수건 하나 두르지 않고 숲 속을 누비기도 했다. 아담과 이브가 되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태초부터 공유한 우리들의 기억은 씨뿌 숲 속에서 다시 살아났다. 나는 문명인의 껍데기를 벗지 못해 아담이 아담으로 회귀하는 일에 어색한 미소만 띨 뿐이었다. 독일 여자 친구 하나가 비키니를 벗어던지면서 에덴의 동산에도 이브가 나타났다. 그럼에도 나는 끝까지 문명인, 한국인이었다. 가슴 한쪽을 아슬하게 지탱한 끈이 신경 쓰였고, 반절밖에 가리지 못한 엉덩이가 지나치게 푸짐하지 않은지 걱정이 되었다. 이브가 되는 일보다 한국인의 탈을 벗는 게 더 힘들었나 보다.


모닥불 피고 추억의 노래 타임. 오아시스와 같은 90년대 밴드 노래를 불렀는데, 아니 이 친구들 90년대생 아녔던가?


핀란드인들이 하는 유머에는 사우나에 관한 일화가 많다. 평소에 침착하고 서늘하리만큼 말이 없는 그들이 사우나에만 들어가면 말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우스갯소리로 그들은 사우나에서 제일 말이 많다고 한다. 짐작컨대 사우나가 주는 묘한 편안함 때문일 것이다.  


어두컴컴한 사우나에 희미하게 새어 나온 자연광에 기대어 숨을 무겁게 쉬고 있자면, 기억나지 않을 온도가 떠오른다. 세상에 나오기 전에 엄마와 함께 쉬었던 날숨과 들숨, 그때마다 출렁이던 양수의 온도. 아마 그런 느낌이지 않았을까 상상하였다. 핀란드 사우나에서 우리는 옷도 벗고 부끄러움도 벗고 그간의 때는 씻겨보냈다. 서로에게 정직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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