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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nfonia Nov 27. 2023

나는 성능이 좋은 스포츠카니깐

한국인이 한국에서 생존하기 위해 상담소에 갔다

2020년, 나는 숲 속에 사는 무민이 되어서 한국에 돌아왔다. 내가 아는 거라곤 겨울 왕국에서 살아남는 방법 밖에 없었다. 한국에 오니 모두가 서울의 집값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월세 겨우 30만 원인 학생 아파트에서 룸메이트와 살았던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남들이 치열하게 산 삶을 부랴부랴 학습했다. 최저임금을 주는 문화예술계를 등졌다. 이로써 나의 석사 학위도 큰 의미가 없어졌다. IT 업계로 오니 나는 느림보 중 느림보였다. 나에게 버거운 속도로 앞만 보고 달리다가 2022년 연말, 사고를 당했다.


인생에도 충돌주의 표지판이 있으면 좋겠다


나와 내가, 핀란드 이전과 이후의 세계가 충돌하는 사고였다. 대학을 막 졸업했을 땐 문화예술로 공공의 이익을 실현하고 싶다는 거창하고도 허황된 꿈이 있었다. 그 꿈 하나로 120만 원짜리 월급도 김밥을 먹으며 하는 야근도 이겨냈다.


하지만 한국에 돌아온 30대의 나는 다른 사람이었다. 핀란드에서 높은 물가에 허덕이며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살았다. 꿈만 먹고 살기엔 지난날의 가난함이 지겨웠다. 문화예술계에서 그나마 안정적이라 선택한 공공기관은 월급도 자유로움도 쥐어짜는 수준이었다. 키보드조차 속닥거리는 그곳을 나오는 날, 나는 드디어 한숨도 편히 쉴 수 있었다.


핀란드는 가난한 삶에 대한 뼈저린 교훈과 자유에 대한 갈망만 남기고 떠나버렸다. 내가 알던 나는 사라지고 없었다. 새로운 나와 다시 부대끼고 살아야 했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이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나? 왜 살고 있나? “


죽고 싶다는 말보다 먼저 나온 말이었다. IT 업계로 왔지만 여전히 일이 즐겁지 않았다. 이제 돌이킬 수도 없었다. 뒤늦은 나이에 한 선택마저 이 지경이라니.


정신을 못 차린 내 탓이오. 이십 대를 충실히 보내지 않은 내 탓이오. 현실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성급하게 결정을 내린 내 탓이오. 아침에 일어나서 나에게 내뱉는 말이었다.


My Mad Fat Diary - 이 드라마에서도 주인공은 상담을 받으며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한다


‘내 탓이오 병’에 걸렸다. 상담소, 심리상담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내가 나에게 퍼붓는 공격을 홀로 이겨낼 수 없었다.


상담의 표면적인 이유는 "일하기 힘들어서요"였다. 상담 신청을 하자 검사가 이어졌다. 문장완성검사, TCI, MMPI까지 총 세 개의 검사를 받았다.


선생님이 검사지를 들며 말했다.


"신포니아씨는 한 마디로 말하면... 그러니깐 아주 성능이 좋은 스포츠카예요"


“저는 한 번도 빠르게 산 적이 없는데요…?”


"그러니깐 신포니아씨는 남들보다 갑자기 빨리 달릴 수도 있고 그러다가도 어떤 위험이 조금이라도 감지되면 바로 멈출 수 있어요. 작은 변화에도 아주 예민하게 반응해서 액셀도 브레이크도 조금만 눌러도 작동이 되는 스포츠카 있죠? 비유하자면 그런 사람 같아요."


서른다섯 살의 삶이 새로운 단어로 꿰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피아노를 포기했던 13살의 봄, 어떠한 말도 없이 끊어버린 인연들, 매년 다른 사무실에 앉아있던 내가 스쳐 지나갔다.


"인내심이 아니라 세상과 사람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 금방 그만뒀을 거예요. 내가 어떻게 해도 이 세상은 변하지 않을 거라는 그런 마음 있죠? 오히려 신포니아씨는 아주 불합리한 일도 누가 시키면 다 해낼 만큼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에요. 자신의 불편함을 협상할 줄 모르는 거예요. “


제멋대로여서, 인내심이 없어서, 쓸데없이 예민해서. 서른 다섯 해 동안 꼬박 주석처럼 달렸던 말들이 역사가 무색하게 한눈에 지워졌다. 내가 숨 쉬고 사는 것만으로도 함께 했던 죄책감도 조금은 희미해졌다.


“스포츠카를 잘 다루려면 운전자가 정말 중요하죠. 신포니아씨는 아직 그런 차를 잘 운전할 줄 모르는 것 같네요. “


결국 나는 다시 운전을 배우기로 했다. 상담소에 가서 지난 궤적을 따라가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돌아보았다. 지난 상처를 들춰야 했고, 자주 울어야 했고, 때때로 누군가의 탓을 했고, 덮어놓은 문제를 항시 노려봐야 했다.  


결국 그 길 끝엔 하나의 문장만 남았다. 구태의연하면서 엄숙하기까지 한 그 말.


"나를 사랑하세요"


매번 상담 선생님이 숙제처럼 내준 말이었다. 이 말이 주는 어감이 낯간지럽고 어색하여 대신 나는 이렇게 말하기로 했다.


"난 성능이 좋은 스포츠카니깐"



나에겐 ‘비비디 바비디 부’와 같은 주문이다. 이제 좋은 일만 생길 거라는 희망은 현실에 없다는 것을 안다. 그보다 역경 속에서도 희망 속에서도 그럭저럭 살아가는 그런 내가 소중하다는 것을 안다. 안다고 강조하여 말하지만 여전히 실천하기 어려워 주문을 외운다.


새빨간 뚜껑이 반쯤 열린 스포츠카. 그 안에서 조심스레 운전대를 잡은 나를 생각한다. 어떤 길이든 잘 달려 나가려는 나를 격려한다. 아마 그렇게 사랑이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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