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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파르 Mar 08. 2024

밥 먹기 싫어요

밥의 자유

영웅담은 아니지만, 저는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2년 동안 세끼를 혼자 먹었습니다. 공부하는 그 앉은자리에서 먹기도 하고 열 발자국 걸어가 휴게실에서 먹기도 했어요. 식사 시간이 참 곤욕스러웠습니다. 점심, 저녁 두 끼니의 도시락을 싸서 도서관에 갔었는데, 도시락에 눈길 주지 않고도 입에 음식물을 욱여넣을 수 있도록 메뉴는 언제나 김밥이나 주먹밥이었고, 추운 겨울이면 저녁 도시락은 이미 꽁꽁 얼어서 씹어서 삼키고 나면 턱근육이 아리곤 했지요. 그럴 때마다 "신이 있다면 왜 그 또는 그녀는 인간이 식사를 할 수밖에 없게끔 설계했을까?" 원망 아닌 원망을 하곤 했습니다. 식사를 하는 행위는 제게 생존에 필요한 영양소를 고루 섭취하는 행위, 예컨대 시간이 좀 더 많이 걸리는 영양제 섭취 행위, 그 정도의 의미였습니다.


그 이후에도 여유 있고 우아하게 식사할 수 있는 인생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식사하는 행위는 제게 생존을 위한 영양소 섭취 행위 정도의 의미뿐입니다. 안 먹을 수만 있다면, 안 먹어도 지금의 체력, 체격, 체중이 유지된다면 정말이지 안 먹고 싶은 것이 밥이에요. 그러다 보니 저는 다른 사람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경우 타의에 의해 식사 시간이 1시간 30분 정도를 넘어가면 어지럼증이 오기 시작합니다. 그냥 몸이 베베 꼬이고 똬리를 틀게 되는 지루함 증세 정도가 아니라, 현기증이 나서 저도 모르게 좌우로 머리를 흔들게 되고 누군가가 제 등 속에 앉아 뒷목 근육을 줄다리기를 하듯 잡아당기고 있는 것처럼 두통도 옵니다. 정말 진심으로 너무나도 괴롭습니다. 그 괴로움은 일시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식사 시간이 끝나고 난 뒤에도 후유증으로 남아 회복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저를 가장 잘 알고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부모님 마저도 그런 일로 괴로워하는 제게 "마음 편하게 식사하면서 남의 말 좀 들어주는 게 그렇게 어렵냐?"라고 하시는 걸 보면 제가 사회부적응자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런 부모님의 말씀에 저는 서운함이 쓰나미처럼 밀려와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던 부캐 "속 좁은 삐꾸쟁이 대마왕"으로 돌변하고는 좀처럼 풀리지 않습니다.


노희경 작가님의 작품 "괜찮아 사랑이야"에서 주인공 해수의 남자친구가 육체적인 바람을 피우고 비가 오는 날 해수를 찾아가 "실수였다."라고 이야기하는데도 해수가 이별의 마음을 돌리지 않자 해수의 남자친구는 해수에게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랑 300일 동안 잠자리 안 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알아? 길 가는 남자들한테 물어봐, 사랑하면서도 같이 안 자는 니가 정상인지, 내가 정상인지"라고 비를 맞으며 처절하게 항변합니다. 해수는 "물어보긴 뭘 물어봐, 니가 정상인 건 나도 아는데, 비정상은 난데. 말했잖아, 나는 엄마가 20년 넘게 불륜하는 걸 봐서 섹스는 나쁜 거라고 생각하는 정말 이상하고도 끔찍한 병을 앓고 있다고."라고 말합니다. 결국 해수는 "오늘이 너랑 마지막이야."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지요. 저도 길 가는 사람 붙잡고 물어보지 않아도 알아요. 마음 편하게 식사하면서 남의 말 좀 들어주는 걸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는 제가 좀 이상하다는 걸.




더욱이 함께 식사하는 사람과 저의 관계가 대등하지만은 않은 경우 저와 함께 식사를 하는 사람의 눈에는 밥 먹으면서 말 좀 길게 했다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 천장을 보면서 눈 감고 한숨을 쉬는 데다가 대화에 집중하지도 않고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기까지 하는 제 모습이 인간미 또는 4가지가 없어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은 듭니다. 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제 문제 때문에 일어나는 일인데 그럴 때마다 "영웅담은 아닌데요, 제가 사실 사법시험을 준비할 때부터 식사를 말입니다~"하면서 주저리주저리 이유를 설명할 수도 없고, 참 난감하지만 그냥 인간미 또는 4가지가 없는 사람으로 오해받는 편이 낫겠다 싶어 그냥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헌법은 인간이라면 당연히 갖는 다양한 기본적 권리에 관해 규정하고 있는데요, 밥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는 자유, 밥 먹기 싫다면 안 먹을 자유, 밥 먹다 말고 싶다면 먹다 말 자유, 밥을 10분 만에 흡입하듯 먹고 싶다면 그렇게 먹을 자유, 밥 먹다 에어팟 끼고 싶다면 낄 자유, 즉 "밥의 자유"가 규정되면 어떨까.. 망상에 빠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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