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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비 Apr 21. 2023

날 선 세상에 맞서, 무뎌질 것

1. 요즘 내가 우울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가 인테리어 하자였다.

그리고 발견된 하자들이 바로바로 조치가 안된다는 것은, 무엇이든 바로바로 해야 하는 내 성격에 치명적인 흠이었다.

그래서 나는 하루하루 시들어갔다.


34평 아파트를 올수리 한 친구에게

- 난 고작 바닥, 도배, 시트지 재시공만 했을 뿐인데 돌아버릴 지경이야. 넌 대체 어땠니?

라고 물으니, 친구는 인테리어 공사 기간을 포함해 1년이 넘는 기간을 도라이처럼 살았단다.

역시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것은 정말 무겁고 무서운 일이다.

털썩.


그런데! 급기야는! 오늘 와서 붙박이장을 봐주시던 방재실 직원분이 부주의한 작업 끝에 날붙이로 붙박이장의 필름지를 쭉 밀어버리셨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붙박이장 문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나는 정말 돌아버릴 것 같았다.

요즘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엉엉 주저앉아 발버둥 치며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사람도 사물도 다 나에게만 날을 세우고 달려드는 것만 같은 요즘.

무뎌지려고 노력 중이다.

느림보가 되려고 노력 중이다.



2. 모든 날짜와 시간은 내가 정해. 너는 그때 무조건 집에 있어.

이 통보는 무려 하루 전에 받게 된다.


조폭 같은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업체의 소파를 구매해서 여러모로 고통받고 있다.

결제하던 순간으로 돌아가 손가락을 묶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지름은 신중해야 한다는 교훈을 호되게 배우는 중)


누군가 소파를 추천해 달라고 한다면 무엇을 사면 안 되는지는 기똥차게 논리적으로 답해줄 수 있게 되었다.



3. 우울함에는 금융치료지?

점심시간에 매우 매우 짧은(단타의 "단"은 짧을 단이다. 하지만 정말 많이 짧았는걸!!!) 단타로 스쿼미시 세벌정도 살 돈을 벌었다(가장 영화로운 점심시간이었다)

돈의 단위는 앞으로 스쿼미시*로 하겠다.

- 오늘 3 스쿼미시를 벌었군!

스쿼미시에 푹 빠져서 애가 이상해졌다

* 아크테릭스의 여름 바람막이


그리고 구매했던 아이패드미니 6가 총알배송되어 왔다.

아이패드는 미니 1, 2, 4를 수년째 사용 중인데 오랜만에 미니 6으로 업그레이드를 해봤다.

갤럭시를 쓰면서도 어쩐지 웹툰머신은 아이패드를 고수했던 나의 외모지상주의(예쁜 게 최고시다)가 갤럭시에서 아이폰으로 큰 혼란 없이 옮겨가는데 큰 몫을 하긴 했지.

아이패드를 바꿔본 게 너무 오랜만이라 이렇게 지들끼리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알아서 셋업 해버리는 모습에 갬동 또 갬동.


미니 6 옆에 있으니 미니 4가 급 늙은이 같이 느껴지지만 그립감은 미니 4가 훨씬 좋다.

미니 6의 날 선 모서리가 마치 요즘 나를 향해 날을 세운 세상 같아 마음을 밸 것 같다.



4. 친구가 집을 샀다.

사람들하고 거리를 두고, 니 인생 내 인생 선을 명확하게 긋고 신경 쓰지 않고 살았는데 희한하게 그 친구에게는 자꾸 나의 생각을 강요하게 되었어서 한동안은 미안하고 괴로운 마음에 거리를 두어야 하나 고민도 많이 했다.


내가 너무 몰아붙이고 다그치기도 했던 것 같다.

- 아니, 내가 뭐가 잘나서 내 생각을 강요하는 거야?

머릿속으로는 이성이 빠릿빠릿 돌아가는데 자꾸 그녀에게만은 마치 나에게 하는 것처럼 매서운 잣대를 들이대게 되었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런 나를 피하지 않고 다 받아내더니 결국 오늘 집을 계약했다.


난 부동산 폭락이도 폭등이도 아니다.

단지, 그녀가 앞으로 이사걱정 하지 않고 집주인 눈치 보지 않고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오래오래 살아도 되는 둥지를 마련하게 되어 기쁘다. 아니 마음이 놓인다.

내가 세상에 내어 키운 생명이 집을 산 것처럼 뿌듯하다.

(그녀가 이렇게 훌륭하게 서는데 나는 먼지 한 톨 보탠 것이 없는데 이 급발진은 무엇?)


그리하여 같은 아파트 주민이 되었다.

아.. 결국 나의 큰 그림은 이것이었나?


큰 벌레가 나타나면 전화할게. 둘이 같이 노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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