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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횡 Oct 14. 2024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누군가 난간을 딛고 서 있었다.

한번 생각해 보자.


당신은 우연히 올라간 건물 옥상에서 자살하기 위해 난간을 딛고 올라 사람을 보게 되었다. 과연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기분 좋은 상상은 아니지만 스스로에게 가끔 하는 질문이다. 물론 구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자리를 피할 수도 있을 것이다.(어딘가에 신고하고 피하거나 어쨌든) 하지만 어떤 도의적인 책임감을 느껴 구하려고 마음먹었다고 해보자. 일단 112든 119든 눌러지는 대로 신고를 한 후, 그들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무슨 말로 시간을 벌 수 있을까? 무슨 말로 그 사람을 설득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어떤 말이든 걸어서 시간을 끌 수 있을지언정 그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해서 설득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일단 떠오르는 몇 가지 설득하는 말들을 생각해 보자.


1. 자살할 용기로 살아가라.

2. 그래도 참고 살아가다 보면 행복한 날이 올 것이다.

3.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해라.


내게 딱 떠오르는 것은 이 정도였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 자살을 하려는 사람 입장에서 반박을 해 보았다.


먼저 첫 번째. 자살할 용기로 살아라. 이건 정말 의미 없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용기라는 것이 무슨 쌀자루 마냥 여기저기 옮길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죽을 용기와 살 용기는 아주 다르며 둘 사이에 교환이 가능하다면 아마 자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니 살 용기를 죽을 용기로 옮겨 죽는 사람이 많았으려나? 여하튼 설득력이 높지는 않아 보인다.


두 번째. 참고 살아가다 보면 행복한 날이 올 것이다. 맞는 말 일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인간은 거대한 고통 안에서 행복이라는 진통제를 맞으며 살아가는 존재이며, 모두가 언젠가 올 잠깐의 행복을 기다리며 산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잠깐의 행복이 내 미래에 올 것이라는 예상이 합리적이기 위해서는 조건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미래에 행복할 수 있는 과거를 보내고 현재를 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인생이라는 것이 넣은 만큼 나오는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니지만, 지나간 과거와 내가 살아가는 현재에 근거해서 미래를 추측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열심히 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금 혹은 과거에 미래를 위해 무엇인가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자살하려는 사람은 어떨까? 누군가 자살하려 한다면 그럴만한 과거를 보내고 그럴만한 현재를 살고 있을 확률이 높다. 합리적으로는 행복한 미래를 떠올릴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렇기에 미래에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은 약간 공허하게 들릴 가능성이 높다. 역시 설득력이 조금 떨어진다.


마지막 세 번째.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해라. 이 말이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 자살하려는 사람을 설득할 때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아닌가 싶다. 보통 이 말은 하면 갑자기 난간 위에 서 있던 사람이 가족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고 그대로 털썩 주저앉는다. 근데 진짜 그럴까?


자살하려는 사람의 목적이 무엇일까? 사람마다 조금 다를 수 있겠지만 아마 고통에서의 해방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고통을 받고 있는 주체는 바로 나이고 말이다. 고통받는 나를 해방하기 위해 자살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해 보라고, 남겨질 가족들을 생각해 보라고 하면 어떻까? 지금 눈앞에 뛰어내리려는 사람은 이미 그 사람들을 위해 지금까지 버텨왔었을 수 있다. 그러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끝내려고 하는 것이다. 자금 와서 그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고 한들 정작 고통받는 나에게 달라질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난간 밖이 아닌 안으로 내려왔을 때 그저 똑같은 일의 반복만 일어날 뿐이다.   


이렇게 써 놓고 보니 좀 그렇긴 한데, 이건 어디까지나 '완고한' 자살자를 가정했을 때 이야기이다. 이렇게 완고하다면 옥상에 올라갔을 때 난간 위에 서있는 모습이 아니라 막 뛰어내리는 모습을 볼 확률이 높다. 아니면 이미 떨어지고 있거나 떨어졌거나 말이다.


하지만 난간 위에 서있는 사람을 봤다면 그 사람은 아직 치열하게 삶과 죽음 사이에서 고뇌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아니 살고 싶을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 실제로는 이런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고민을 들어주며 그 사람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는 것이 자살을 막을 수 있는 확률을 높인다고 한다.


원래는 여기까지 생각했다가 최근에 좀 더 생각을 해 보았다. 세 번째인 사랑하는 사람이나 가족을 생각해 보라는 것에 대한 것이었는데, 나는 이 말이 여러 미디어에서, 혹은 실제로 자살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자주 쓰이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고 이 말에 설득력을 높일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세 번째 말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무엇이 바뀌어야 할까? 내 생각에는 인간의 삶의 지향이 바뀌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기본적으로 나는 스스로를 지향하는 삶을 가정하고 생각을 해 보았다. 나는 나를 지향하고 나를 위해 있기에 내가 고통을 받는다면 자살을 택하는 게 꽤나 합리적으로 보인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삶이 타인을 지향하는 삶이 된다면 어떨까? 나의 삶에 의미가 단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도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해 보라는 말은 나름의 합리성을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것이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고 살아가는 이유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물론 뭐가 맞는지는 모르겠다. 나를 지향하는 삶이 틀리다고, 그리고 타인을 지향하는 삶이 꼭 옳다고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그 사이 지점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결론적으로는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난간 위에 서 있는 사람에게 대체 뭐라고 말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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