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난나 Jan 21. 2024

재밌지만은 않은 가족 이야기, 펀 홈

2023년 12월의 밀린 책 | 펀 홈 (앨리슨 벡델)

책속의 말

죽음은 본질적으로 어처구니없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우리 웃음도 반드시 부적절한 반응만은 아닐 것이다. 방금 전까지 여기 있던 사람이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것 아닌가. 황당하고 기막힌 일이다. (p.53)
건물 외부라는 배경, 가슴 저미는 미소, 구부린 손목, 심지어 얼굴에 드리운 그늘 각도까지. 아빠와 내 사진은 마치 잘 옮긴 번역문처럼 꼭 닮았다. (p.126)




영화계에는 ‘벡델 테스트(Bechdel test)’라는 게 있다. 아마 들어본 사람도 꽤 있을 텐데, 영화계의 성차별을 지적하기 위해 만들어진 테스트이며 조건은 간단하다.

1.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를 최소 2명 포함할 것
2. 서로 이야기를 나눌 것
3. 남성에 대한 것 이외에 다른 이야기를 나눌 것

이렇게 간단한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는 영화도 제법 많아 새삼스럽게 영화계의 성차별이 대두되기도 했다. 이 테스트를 만든 게 바로 이 책의 저자인 앨리슨 벡델이다. “펀홈”은 앨리슨 벡델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그래픽 노블이다. 동성애자였던 아버지와 동성애자인 앨리슨의 관계, 유년 시절 가족과의 추억과 그것이 앨리슨에게 미친 영향을 섬세하게 그래픽 노블로 표현했다.

“펀홈”의 중심인물은 아버지(브루스)와 앨리슨, 어머니(헬렌)다. 특히 이 책에서 집중하는 건 아버지와 앨리슨의 관계다. 아버지와 어머니, 어머니와 앨리슨의 관계도 책 속에서 드러나기는 하지만 보다 자세하게 묘사하는 건 마치 거울과도 같았던 아버지와 앨리슨의 관계다. 여성이 되고 싶다는 생각해본 적 있는 아버지와 남성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는 앨리슨은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닮았다. 앨리슨이 어린 시절, 아버지는 딸에게 문학 작품을 (자칫 강제적이라고 보일 정도로) 읽혔고, 성장 후에는 딸이 아버지에게 문학 작품을 추천하며 서로에게 문학을 통해 영향을 미쳤다. 마치 그것이 시차를 가지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지금 당장은 거부하지만 결국에 서로에게 영향을 미쳤음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앨리슨은 커밍아웃을 했으나, 퀴어에게 가장 극적이고 중요한 순간일지도 모르는 커밍아웃은 이내 아버지의 자살로 추정되는 사고로 인해 덧칠된다. 앨리슨이 아버지에게 품는 감정은 복잡하지 않을 수 없다. 

가족을 회상한다면 단순히 에세이 형식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벡델은 그래픽 노블을 택했다. 그래픽 노블이란 개인적으로 두 겹의 은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으로도, 글로도 숨은 뜻을 담을 수 있는 두 개의 그릇과도 같다. 누구보다 솔직히 이야기하고 있지만, 동시에 겹겹이 숨겨진 의미는 곱씹어 보거나 다시금 유심히 읽어야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굉장히 문학적인데, 각종 문학 작품의 인용 및 오마주가 등장하기도 하고, 그것을 글로써, 그림으로써 표현하기 때문이다. 문학 작품 속 인물에게 가족 구성원을 비유하거나, 작품 속 상황에 대입해보기도 한다. 

은유적이지만 동시에 적나라할 정도로 솔직한 이 작품을 집필하며 앨리슨은 카타르시스(정화) 경험을 하지 않았을까? 이 책의 집필 과정 자체가 본인에게는 고통과 그 이후 치유를 선사했을 것 같다. 이 책의 부제가 ‘가족 희비극’인 것처럼 어느 가족이든 정도는 다르지만, 각자의 가족 희비극이 존재할 것이다. 이 책은 앨리슨이 그랬듯, 우리 가족의 희비극을 떠올리게 한다. 그때부터 이것은 앨리슨 벡델만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작가의 이전글 삶의 이정표가 필요할 때, 수전 손택의 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