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여성 작가의 책 | 커리어 그리고 가정(클라우디아 골딘)
1960년 이래 미국이 이룬 경제 성장의 20-25%는 고용, 훈련, 교육에서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장벽이 낮아진 데서 기인했다. 과거 같으면 변호사의 비서가 되었을 여성이 이제는 변호사가 될 수 있고 초등학교 자연 선생님이 되었을 여성이 물리학자가 될 수 있다. 여기에서 여성들 개개인도 이득을 얻지만, 이 개인적인 이득은 자원의 배분을 향상시키고 경제 성장을 촉진해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도 득이 된다.
각 세대는 나름의 형태로 성공을 달성했고 다음 세대에게 바통을 넘겨주었다. 바통을 이어받은 세대는 앞 세대에게서 교훈과 지침을 얻었다. 또한 앞 세대의 의사결정에서 경고도 얻었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여성들이 내린 의사결정은 실수가 아니었다. 각 세대에게 주어진 제약들과 미래의 전망을 가늠할 수 있는 당대 여성들의 역량 하에서 적합하고 타당하게 내려진 결정이었다.
여성들은 물살을 거슬러 헤엄치고 있었다. 꿋꿋이 자신의 길을 가고는 있었지만 강한 경제적 급류에 맞서면서 헤엄치고 있었던 것이다.
"여성 노동 시장 결과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킨 공로"로 클라우디아 골딘 교수가 2023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여성으로서는 세 번째 노벨 경제학자 수상자라고 한다. 골딘 교수가 하버드에 종신 교수로 임용되었을 때가 1990년인데, 당시 하버드 경제학과 최초의 여성 종신 교수였다고 한다. (참고로 한국의 경우 2020년이 되어서야 서울대 경제학과 최초의 여성 내국인 교수로 박예나 교수가 임용된 바 있다.) 골딘 교수의 명저 “커리어 그리고 가정”은 성별 소득 격차의 원인을 데이터로 분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한 책이다.
골딘 교수는 남녀 임금 격차 문제에서 명시적인 유형의 차별은 이전에 비해 많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기혼 여성의 고용을 제한하는 제도나, 여성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해당 업무에 배치하지 않는 종류의 차별이다. 그렇다고 많은 여성이 차별에 직면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여전히 성별 소득 격차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 원인을 골딘 교수는 철저히 데이터로 분석하기 시작한다. 남녀 간 소득 격차는 커리어 격차의 결과이고, 커리어 격차는 부부간 공평성이 깨지는 데서 비롯하며 결국 ‘탐욕스러운 일’이 문제임을 지적한다. 탐욕스러운 일의 성격상 남성과 여성 둘 다 가정도 갖고 커리어도 챙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남성은 가정도 갖고 커리어의 속도도 낼 수 있지만, 그것은 여성이 커리어의 속도를 늦추고 집안일을 챙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물론 남성도 여성도 가정을 갖는 일에 집중할 수 있지만, 그 경우 가계 전체 소득이 현저히 줄어든다. 남성도 여성도 커리어를 추구한다면 가정을 갖는 일이 어려워진다.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하기에 앞서 정의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커리어’는 단지 소득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생애에서 장기적으로 지속되며 당사자가 열망하고 추구하는 종류의 일에 고용된 상태’를 뜻하며, ‘가정’은 아이가 있는 가구를 뜻한다. 또한, 저자는 분석의 초점을 ‘대졸 백인 여성’에게 맞추었다. 골딘 교수는 먼저 미국 대졸 여성 집단을 총 다섯 집단으로 분류한다. 가정 또는 커리어 둘 중 하나만 추구할 수 있었던 집단(출생 연도: 1878~1898년), 일자리를 먼저 추구하고 가정을 추구할 수 있었던 집단(1898~1918년), 가정을 먼저 추구하고 일자리를 추구할 수 있었던 집단(1918~1938년), 커리어를 먼저 추구하고 가정을 추구했던 집단(1938~1958년), 커리어와 가정 둘 다를 추구하는 집단(1958~1978년)으로 분류하고, 그들의 궤적을 추적한다. 참고로 가정을 아이가 있는 가구로 정의했기 때문에 편의상 집단 5의 출생 연도를 1978년에서 끊은 것이다.
집단 1은 직접적인 차별이 팽배하던 시대에 태어나 커리어와 가정 둘 다 추구하는 데 성공한 여성이 극소수였고, 미혼과 비출산 비중이 높았다. 집단 2는 집단 안에서도 편차가 큰데, 당시 기술의 발전으로 노동 절약적 도구가 보편화하여 가사노동에 투자하는 시간이 줄었고, 화이트칼라 노동 수요가 증가하며 낮은 결혼율과 출산율에서 높은 결혼율과 출산율로 서서히 이동하던 징검다리 시대이다. 집단 3으로 가면 집단 2의 변화를 물려받아 결혼 연령과 여성의 첫 출산 연령이 낮아졌다. 아이를 낳고 나서는 노동 시장으로 돌아가려고 시도한 세대이기도 하다. 집단 4는 피임약의 보편화로 조용한 혁명이 이루어진 세대이다. 커리어를 먼저 추구하고 가정을 추구하려 했으나, 나이가 들수록 생식 능력이 저하된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에 출산이 불가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집단 5로 갈수록 과학과 의학이 발달하고, 의료 보험 보장 범위가 확대되며 기술의 힘을 빌려 커리어와 가정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집단 5까지 오면 이제 여성 앞에 더는 방해물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노동 시장에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 부부의 경우 아이 양육과 가계 총소득 증가를 위해 탐욕스러운 직업(고강도, 장시간, 온콜(항시 대기 체제), 고임금)은 주로 남성이, 유연성 높은 직업(유연성 있는 시간 활용, 저임금)은 여성이 맡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같은 직종이어도 탐욕스러운 직업에 종사한 경우 훨씬 많은 임금을 받게 되어 격차는 점점 커진다. 골딘 교수는 이는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시스템의 문제임을 지적한다. 탐욕스러운 직업의 노동구조를 개선하고, 돌봄 환경을 개선하는 방법을 제시한다.더불어 노동자의 합의와 남성의 육아 참여가 필요하다는 점을 언급하며 마무리한다.
이 책은 노골적인 차별이 성별 소득 격차의 주원인일 거라는 나의 편견을 방대한 데이터를 철저히 분석함으로써 깨트린다. 수많은 데이터와 그 데이터를 가공해 분석했을 골딘 교수를 비롯한 연구팀을 생각하면 그 집념에 경의를 표하고 싶어진다. 그 외에도 감정적으로 뭉클했던 건 과거 여성의 업적을 지우지 않고 당시 여성 나름의 최선의 선택으로 삶을 이어왔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하는 점이었다. 데이터와 분석으로 이루어진 책이라 그런 감동을 느끼기 어렵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그 시절의 여성이 고여있거나 머물러 있지 않고 계속해서 역동하는 존재였다는 점이 마음 깊이 다가왔다. 단순히 지나간 과거의 현상으로서가 아니라 주체성을 띤 하나의 존재로서 느낄 수 있게끔 골딘 교수는 그들의 업적을 되짚는다.
하지만 독서 모임에서 다 같이 얘기하며 아무래도 미국의 현상을 분석하다보니 한국과는 괴리가 있다고 느꼈다는 의견을 공유했다. 원인 분석에 비해 해결 방안은 비중이 적어 아쉬운 점도 있었다. 돌봄 노동과 공동 육아에 대한 이야기가 더 필요하지 않았나 싶었다. 결국, 복지(노후 대책과 아동 복지)의 부재가 이 커리어 격차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한국은 OECD 가입국가 중 성별 소득 격차로 항상 꼴찌를 하는 국가이다. 단지 ‘여성이라서’ 채용이 되지 않은 채용 성적 조작이나 승진 누락, 여성 임원 부재와 같은 상황을 일상적으로 목격하는 한국의 현세대는 체감하건대 집단 6으로 분리되어야 하지 않을까. 커리어를 추구하지만, 가정은 추구하지 ‘않는’ 집단. 아예 추구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게 된 세대를 골딘 교수는 어떻게 분석할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