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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잡것들 Oct 16. 2021

네? N잡것 부르셨어요?

written by. 김해피

"김해피, 눌루랄라 너네 그거 아니? 니들이 일하고 있는 문화콘텐츠 업계에는 슬픈 전설이 있어.

전생에 고집쟁이들 고집은 고쳐쓸 수가 없어서 고민에 빠져있던 신이 결국 한 명씩 같은 세계로 집어던져버렸는데 그게 문화콘텐츠 업계였고 (심한 욕) 형편이 나아지는 것도 아닌데 미친 업무량에 타협할 생각이 전혀 없는 인간들만 모이게 되었다는 전설… 이 전설을 듣고도 좋아하는 것을 업으로 삼겠다고 마음먹은 자들은 반드시 더욱 가혹한 직장생활임을 느끼게 될 것이다. 와하하.하핳ㅎ흫흑흑흑…."


눌루랄라와 대학교를 함께 다니는 동안 무엇이 가장 기억에 남냐고 묻는다면, 지갑과 시간이 허락하는 한 주저 않고 여기저기 온 힘을 다해 밴드 공연을 보러 다녔던 것이라 답할 수 있겠다. 당시 이곳에는 KTX가 없었고 새마을호는 그 존재를 인식도 못할 정도로 낮은 배차율을 자랑했으므로 아주 높은 확률로 요상한 기차 냄새계의 탑티어 무궁화호를 탔어야 했다. 그마저도 사정상 미리 예매를 못하거나 급하게 가야 하는 날에는 입석표를 끊고 열차카페와 가까운 4호차 플랫폼에 서있다가 열차카페로 돌진. 혹은 어느 칸이든 가장 뒷좌석 뒤에 사람 둘 정도 들어가는 틈이 있었는데 그 틈에 노숙인간들처럼 앉아서 갔다. 음악과 공연에 미쳐가지고는 이 자리가 더럽지도 부끄럽지도 않은 놈이 또 있다니 정말 눌루랄라를 만난 것은 행운이라 생각했고, 지금 우리는 모두 음악 산업의 N잡것이 되었다. 네, N잡러 아니고요. 분명히 잡은 하나인데 하는 일은 여러 개인 N잡것.

하하 퍼니.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다 보니 진짜 닥치고 일만 하게 되었고, 닥치고 일을 하다 보니 그동안 평생 이 직장에만 있을 것처럼 너무 안일하게 일을 했다는 생각에 불안함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나의 직업세계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정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모어잡클럽을 오픈했다.


노모어잡클럽은 우아한 N잡것 라이프를 응원하고 격려하는 것에 그 의미가 있다. 일에게 삶의 주도권을 뺏기지 않고, N잡것-예민함=0 임을 인정하지만 결코 다정함을 잃지는 않을 것이라는 선서 의식 같은 것. 이럴 때 중요한 레퍼토리는 역시 초심을 기억하는 것이므로 나는 나의 N잡것 라이프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되짚어보기로 했다.


2000년대 초딩이었던 나는, 90년대부터 흔치 않은 잡덕이었던 친척 언니들의 생활을 들여다보는 것과 하교 후 엠넷, KMTV에서 나오던 뮤직비디오를 집중해 감상하는 시간을 두고는 했다. 그러나 여전히 취미로 합창을 하고 직업인으로의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순진무구한 초딩일 뿐이었다. 정확히 초등학교 5학년이 다 끝나가던 겨울 무렵까지는 그랬다. 나를 클래식 음악가에서 대중음악의 세계로 인도한 운명의 아이돌을 만나고 부모님의 서포트 아래 약 10년 정도 결코 짧지 않은 덕후 생활을 찐하게 했다. (tmi. 본진 탈덕 후 아이돌 박애주의자로 거듭나 모든 아이돌을 탐구한다.) 그 시절 포토샵이라는 신문물은 나를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있게 했고, 팬들과 포스터 만드는 게 취미가 되어 혼자 디자인 툴을 마스터했다. 중딩 때는 팬클럽 서포터 언니들을 도와서 간식을 나르고 인원을 체크하는 아주 귀여운 임무를 맡았다. 그 임무는 소속사로부터 내려온 것이지만 대가도 없었고 심지어는 오빠들 무대를 포기하기도 해야 했다. 그래도 공연장 밖에서 언니들과 담당 직원들과 수다 떠는 시간이 즐거웠다는 게 함정이다. 오 마이 갓. 돌이켜보니 그게 나의 첫 번째 열정페이였다.

고딩 때는 오빠들이 옮긴 소속사의 업무 미숙으로 지방 차대절이 운영되지 않았고, (참고로 그들은 45인승 버스 기준 광역시 기본 10대 이상, 소도시 2대 이상이 필요한 그룹이었음) 내 주변에는 마침 버스 대절이 필요한 팬들이 널려있었으므로 친구들 두 명과 함께 직접 버스 차대절을 진행했다. 친구들이 커뮤니티를 만들고 인원 모집을 하는 동안 나는 버스 회사와 커뮤니케이션하며 버스 대절을 추진했다. 45인승 버스 2대를 끌고 가까운 두 도시의 팬들을 꽉꽉 모아서 잠실에 다녀온 18살 세 명… 이 역시 우리가 자처하여 시간을 쓰고 대가는 없었다는 말이 당연함으로 연결되는 것은 덕질해본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고딩들이 너무 수월히 진행해서 몇 년 후에 다시 열린 콘서트를 앞두고 언니팬들한테 차대절 또 해달라고 연락 왔던 게 킬포.


N잡것의 역사에 청소년기를 빼놓고 설명할 수가 없다. 정말로 그것이 내 N잡것의 시작이었으므로. 좋아서 시작한 일에는 재지 않고 기꺼이 N잡것이 되고야 마는 것. 일은 재미있는 게 최고라 여기는 내 성향과 대가 없는 헌신의 집약체 ‘덕질’이 만나 N잡것으로 나를 인도했을까? 좋아하는 것이 내 삶에 밀어 넣는 힘의 모양을 알고, 최선을 다해 쏟아부었을 때 그 크기를 감히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의 만족스러움을 느끼는데 게다가 내가 하는 일이 좋아하는 아티스트, 좋아하는 음악을 위해서라면 두 번 말할 것도 없이 그냥 직진하는 거다. 지금 우리는 마침내 누군가의 시선에서는 덕업일치를 이루어내고 덕질을 일처럼, 일을 덕질처럼 할 수 있게 된 것을 큰 행운이라 여기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덕업일치했기 때문에 모든 부당함을 감내하는 것이 당연하지는 않다. 월화수목금 밤낮없이 일하고 주말까지 일해야 하는데도 단지 ‘좋아서’라니. 업계에서 누구나 알 만한 회사가 아니고서는 체계도 수당도 없는 것이 현실인데. ‘좋아서 한다’는 동료들의 대답에서 느껴지는 기괴함과 우울함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은 내게도 딱히 다른 대답은 없어서다. 좋아서 돈을 적게 받아도 좋고, 좋아서 못 쉬어도 좋은 것은 이제 혼자만의 좋음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막 시작하는 동료들은 부당한 일들에도 ‘원래 이 바닥이 그래. 좋아서 하는 일이잖아.’ 따위의 말을 들으며 견디는 삶을 살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많이 아찔하다. 더욱 우아한 N잡것이 되기로 결심한 이유다. 스스로의 삶에 일이 존재하는 어떤 명분, 우리가 N잡것으로 사는 것에 저마다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 쉽지 않은 현실일지라도 이제부터는 가능한 나와 당신의 일을 더욱 현명하게 좋아하는 방법을 찾아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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