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요 못잃어족 김해피는 음악을 들을 때 가장 먼저 가사를 들여다보는 ‘습관’이 있다. 말 그대로 고정된 반응 양식 같이 가사를 찾는 내 모습은 가끔 은은한 광기를 품고 있다. 가사가 보고 싶은 곡인데 등록된 내용이 없다면 정확한 가사가 들릴 때까지 한 곡을 반복 재생한다. 그러면 눈동자 도르륵 도르륵 굴려가며 가사를 받아 적고 마침내 직접 등록해버린다. 본디 누군가의 삶과 가치관이 담긴 이야기였을 노랫말을 곱씹으며 음악을 듣다 보니, 당연하단 듯 가사를 통해 음악에 마음을 주기도 또 마음이 멀어지기도 한다. 그러던 한편 본격적으로 노랫말 없는 음악과 일하기 시작하며 노래에 말을 붙이는 작업에 대한 생각은 조금 더 깊어졌다.
대부분의 음악이 ‘말’ 없이도 이야기를 한다. 멜로디, 박자, 화성 같은 것들이 작곡가의 비언어적 표현이니까. 그 음악을 실연(實演)한 곡이 있다면 연주자들의 해석이 또 다른 이야기일 것이니 사실상 우리는 가사 없이도 음악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는 말이다. 거기에 모든 예술작품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이라는 말까지 더하면, 기능적인 것을 뺀 가사의 역할쯤은 잊어버려도 좋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조용한 시간 일기장을 펼치듯 터놓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어딘가에 또 누군가에게 표현하고 싶어 어찌할 줄 모르는 마음들이 있다. 사랑이기도 하다가, 삶에 대한 회의이기도 하고, 불만과 투정이기도 하다. 그렇게 누군가 삼켜내고 마는 마음의 간지러운 부분을 빛과 결, 투명함과 밝기, 높이와 크기가 맞는 음악에 노래하는 것. 적당히 읊조리고 싶고, 뱉어내고 싶고, 토해내고 싶고, 소리치고 싶었던 마음이 정성스레 써 내린 하나의 음악이 된다니. 그 음악과 가사를 마주하는 순간 느끼는 전율은 긍정적인 경험을 만든다.
그런가 하면 이제는 완벽한 콘셉트와 흥미로운 스토리 라인을 내보이는 아이돌 음악에서의 가사는, 덕력을 불식 간에 상승시키는 하나의 장치가 되기도 한다. 작사가가 프로듀서, 작곡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지만 팬들만큼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작사가를 자주 언급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누구보다 본진의 컬러를 꿰뚫고 있는 팬들 눈에 좋은 가사란 한 마디로 이런 거 아닐까?
‘아니… 어쩜 우리 애들이랑 이렇게 잘 어울리는 가사를…?’
이처럼 저마다에게 알맞은 마음을 갖게 하며 유구한 덕질의 역사를 이어오게 만든 ‘노랫말’들이 궁금했다. 그래서 음바(=음악 바보) 눌루랄라를 불러내 가사에 대한 이야기를 던졌다. 가사를 직접 쓰기도 하고, 글이라면 해박한 그와 함께 가사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며 배우고 싶은 게 많았다. 어쩌면 아직은 얕은 지식이라 더욱 흥미롭게 탐험할 세계가 무한하다는 사실에 이 일을 더 미룰 수는 없었다. 음악에 파묻혀 일을 하면서도 노동요 없이는 못 사는 음악 노동자들의 가사 이야기 <가사다라마바사>를 어느 때보다 한껏 달아오른 마음으로 오픈하려고 한다. 쓰는 우리와 보는 사람들이 함께 감상하고, 탄복하며 적잖이 호들갑 떠는 일을 매주 이어나가 보기로 했다. <가사다라마바사>에서 친구와 수다 떠는 가벼운 기분으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N잡것들이 또 일을 벌였다는 소식 이만 줄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