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국적, 무경계, 무장르 맛집
장르를 구분하는 일은 매우 효율적이다. 한식, 중식, 양식, 일식.. 소설, 시, 에세이.. 코미디, 로맨스, 서스펜스.. 시작 전에 이미 파악이 끝난다. 장르 구분이 효율적인 것은 취향으로 넘어오기도 전에 단칼에 자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면에서 우리 가게는 매우 비효율적이다. 한식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모자란 것 같고, 중식이라 하기에는 무언가 다르고, 현지식이라 하기에는 납득하기 어렵다. 그래서 “여기 한국 식당이에요?”라는 질문이 가장 난감하다.(이 질문은 한국 사람들에게 받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저 가장 잘 팔리는, 손님들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다양하게 늘어놓고 판매하는 뷔페 형태의 식당으로 무국적, 무경계, 무장르에 가깝다. 철저히 자본주의에 입각한 메뉴 구성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손님들이 즐겨찾는 맛있는 식당이 되고 싶고, 그것으로 존재 이유를 찾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스토랑(RESTAURANTE)이라는 타이틀을 걸지 않았다. 장르를 규정짓지 않고, 언제든 맛있게 먹고 갈 수 있는 곳, ‘까사 데 델리시아스(CASA DE DELICIAS)’로 명명했다. 글자 그대로 맛집(CASA 집, DELICIAS 맛있는)이라는 뜻이다.
우리 가게의 인기 메뉴로는 떡볶이가 있다. 이 떡볶이는 하얗다. 정확히 말하자면 분홍빛이지만, 아무튼 절대 빨.갛.지 않다. 우유와 치즈로 맛을 낸 크림 소스에 고추장 한 스푼이 들어간다. 고추장이 들어가서 언뜻 k-로제 같은 느낌도 있지만 그보다 훨씬 덜 맵고, 크림 소스의 맛과 색이 더 두드러 진다. 매운맛에 익숙하지 않은 현지인들에게도 부담이 없어 첫 방문 손님에게 입문용으로 권하곤 한다.
김치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떡볶이를 파는 방법은 현지화 되어 있다. 우선 이름이 다르다. *뇨끼스 데 아로스( ÑOQUIS DE ARROZ), 쌀로 만든 뇨끼라고 설명한다. *ÑOQUIS(뇨끼, 곡물로 경단처럼 빚어 만든 파스타의 일종) /DE(영어로는 of 정도의 뜻) /ARROZ(쌀)
뇨끼는 쫀독한 식감을 가졌는데, 떡이 그와 비슷하게 쫄깃한 식감을 지녔다는 것에 착안했다. - 빵 만드는 밀가루가 아닌 - 쌀이 주 원료라는 점은 자연스럽게 *글루텐 프리(밀가루 등에 들어있는 글루텐 성분에 알레르기 반응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그 성분에서 자유롭다고 표시하는 것)와 연결되면서 손님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떡은 낯설지만 뇨끼는 익숙한 현지인들에게 고추장의 매운맛보다 파스타의 친근한 크림소스가 맛과 비주얼 면에서 더 잘 어울리게 느껴졌던 것일까? 하얀 떡볶이는 속된말로 “먹혔다!” 적어도 우리 단골손님들에게 있어 떡볶이는 하얀 게 원조다. 떡볶이라는 원래 이름을 몰라도, 살짝 들어간 고추장의 존재를 몰라도, 그 손님들에게 뇨끼스 데 아로스는 그 자체로 맛있는 파스타다. 어느 나라의 어떤 이름을 지닌 것인지는 중요치 않다. 맛있는 것이 중요하다!
다행이도(?) 최근 몇 년 사이에 떡볶이라는 메뉴 자체가 많이 알려지게 되면서 매운떡볶이를 찾는 손님이 늘어났다. 또박또박 정확한 발음으로 떡.볶.이는 없냐고 묻는 손님들의 눈망울은 매우 진지하다. 그래서 최근에 매운떡볶이를 추가했다. 기존 손님들은 새롭게 등장한 빨간 파스타에 관심을 보이고, 매운떡볶이를 찾던 손님들은 “많이 맵지는 않다”면서 한국인보다 더 맵부심을 뽐낸다.
원조크림떡볶이(뇨끼스 데 아로스)와 퓨전매운떡볶이(뇨끼스 데 아로스 꼰 삐깐떼 ÑOQUIS DE ARROS CON(영어로 with) PICANTE(맵다는 뜻)).
장르는 뒤엉키고, 경계는 무너지고, 국적은 언제나 관심 밖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맛있는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손님들과 함께 오늘도 힘들지만 맛있는 하루를 보냈음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
덧붙임. 매운떡볶이는 백종원 선생님의 레시피를 활용했다. - 고추장이나 간장의 맛이 한국에서 생산된 제품과 차이는 있겠지만 - 현지인들에게 사랑받는 떡볶이를 이렇게 쉽게 만들어서 판매할 수 있다는 것에 다시 한번 백 선생님의 위대함을 실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