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회사의 인재 육성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베이징에 갔다. 여러 차례 경험했던 베이징의 살인적인 공기오염과 2006년도에 베이징에서 두 달 어학 연수할 때 겪었던 위생 관련 사건(?)들 때문에 사실은 가고 싶지 않았다. 석 달 동안 그냥 회사와 숙소만 오가야지 생각하고 운동화 한 켤레도 없이 하이힐만 챙겨서 출장 가듯 갔다.
밤 11시에 숙소 체크인을 하고 보니 내가 약속받았던, 주방기구며 타올 등, 모든 생활 집기가 다 있는 레지던스가 아닌, 가구만 덜렁 있는 빈 아파트였다. 당황스러웠지만 늦은 시각이라 어디를 갈 수도 없어 코트를 덮고 자고 다음 날 아침에는 면 티셔츠들을 모아 머리를 말리고 몸을 닦았다. 회사에 뛰어가 상황을 알리니 3 개월 임대를 무를 수 없으니 필요한 걸 사고 회사에 청구하란다. 결국 가져간 하이힐 두 켤레가 닳도록 발품을 팔아 살림살이를 다 사다 날랐다. 그때 깨달은 건데, 일 년을 살든 삼 개월을 살든 사람이 사는 데 필요한 물품의 가짓수는 똑같다(!).
그렇게 고된 첫 2주를 보낸 후 한 숨 돌리고 나니 슬금슬금 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회사 사람들에게 중국 요리를 좀 배우고 싶다고 하니, 동료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중국 요리학원은 식재료부터 가르치는데, 네가 배울 만한 환경이 아니라는 거다. 어떤 환경이기에 그러나 호기심이 생겼다. 인터넷을 검색해 중국 재래시장을 둘러본 후 식재료 구입까지 도와주는 외국인 대상 관광상품을 알아냈다.
베이징 시내 좁은 골목길에 자리한 전통 가옥인 hutong (후통)에서 시작되는 코스였다. 일찍 가서 기다리니 일고여덟 명쯤 되는 다양한 국적의 수강생들이 하나둘씩 도착했다. 관광객도 있었고, 프랑스에서 온 네댓 살 정도 되는 남자애와 유모차에 탄 아기를 데리고 온 가정주부도 있었다. 그리고, 은색 단발머리의 작은 유럽 여자도 한 명 있었다. 체티나였다.
베이징 재래시장을 가보니 동료들이 왜 만류했는지 그제야 이해가 됐다. 시장의 규모, 상품의 종류, 냄새, 인파와 소음에 정신이 쏙 빠질뿐더러 흙바닥인 시장은 곳곳이 젖어 있고, 상인들과는 말도 안 통했다. 이런 곳에서 내가 알맞은 재료를 사서 요리까지? 내가 그런 걸 할 리가 만무하지 싶어 ‘이 관광, 대체 언제 끝나나’ 생각하며 따라다니는데, 프랑스인 엄마는 가이드를 쫒아다니며 질문하고 필기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그녀로서는 생경한 나라에 와 아이들을 챙겨 먹여야 하니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문제는 그녀에게 손이 두 개뿐이라는 것? 수첩과 펜을 들고 메모해 가면서 유모차까지는 끌고 가는데, 귀엽게 생긴 금발의 아들 녀석이 그 혼돈의 시장을 혼자 돌아다니는 거다.
아이는 돌아다니다 엄마에게 뭔가 이야기해도 상대를 안 해주자 진창 섞인 흙바닥에서 아예 뒹굴며 마구 울어댔다. 중국인 로컬 상인들도 걱정되는지 쫓아와서 가이드에게 뭐라 뭐라 했다. 가이드도 아이를 걱정하는데 정작 엄마는 귀에 검지를 갖다 대더니 날씬한 긴 팔을 쭉 펴서 아이가 우는 방향을 가리켰다. 그러더니 차분한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귀에 갖다 댔다. 나도 듣고 있고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는 제스처였다. 그 와중에 유모차의 아기는 물고 빨던 인형을 물이 흥건한 흙바닥에 떨어뜨렸다. 내가 주워 엄마를 주니, 그걸 또 아기에게 다시 줬다.
그게 시작이었다. 투어 1/3 정도부터 시작하여 아기는 인형을 떨어뜨리고, 아들아이는 계속 대오를 일탈하여 돌아다니며 날뛰고, 엄마는 필사적으로 질문하고 메모하며 선생님을 따라다녔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엄마가 투어에 집중할 수 있도록 나와 체티나가 함께 아이들을 챙기고 있었다. 우리 둘은 시장에서 아무것도 못 사고 빈손으로 투어를 마쳤고, 둘이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에 결국 현대식 마트에서 저녁거리를 사며 함께 한바탕 웃었다.
그렇게 만나게 된 체티나는 은퇴를 앞둔 이탈리아 대사관 직원이었다. 은퇴하기 전에 동양에서 살아보고 싶어서 4개월 중국 파견근무 이야기가 나오자 손을 번쩍 들었단다. 벨기에인 남편은 혼자 이탈리아에 잘 두고 왔다고.
"아아… 역시 베이징은 저에게는 무리네요."라고 이야기하는 나에게, 체티나는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을 하고는 호기심 많은 눈을 반짝였다.
"오늘 너 그래도 여기까지 왔잖아. 내가 재밌는 거 많이 파는 데를 아는데, 같이 가볼래? 내가 안내할게."
그렇게 나를 낚은(?) 그녀는 나를 산리툰 ‘짝퉁’ 시장을 시작으로 베이징의 관광지는 물론, 어떻게 알았는지도 모를 작은 전시회와 찻집들과 나로서는 들어갈 엄두도 못 냈던 진정한 로컬음식점 등으로 안내했다. 중국어를 한마디도 못 했지만 체티나는 실로 '신박한' 의사소통 능력의 소유자였다. 길눈은 또 어찌 그렇게 밝은지.
인생의 문제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조언을 많이 해줬는데, 하루는 체티나가 나에게 자기 숙소에서 커피를 대접하겠다 했다. 자기는 커피 취향이 매우 확고하다며 미니 모카포트로 내린 에스프레소를 내왔다. 그날 이런저런 이야기 중에, 결혼을 앞둔 나에게 조언해준 게 남편이 내 말을 잘 듣게 하는 방법이었다. 아주 쉬운 원리라며 비닐 매듭을 푸는 법과 같단다. 한 방향으로 계속 조금씩 끈질기게 돌리면 매듭이 풀린다며 직접 보여줬다. 현명한 체티나.
그렇게 체티나에게 의지한 나의 베이징 생활이 마무리가 되어갈 즈음, 체티나의 남편인 벨기에인 '할아버지' 마크 올리버가 중국을 방문했다. 저녁을 함께 먹기로 하고, 여느 때처럼 체티나가 나를 저녁 장소로 데려갈 수 있도록 지하철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저쪽에서 체티나가 헐렁한 청바지를 입은 키가 큰 할아버지랑 걸어왔다. 어딘지 체티나와 닮은 장난꾸러기 같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온 할아버지는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나는 정중히 인사했다.
"체티나에게 얘기 많이 들었어요. 반갑습니다. 체티나 없으면 제가 베이징에서 어떻게 살아남았을지 모르겠어요. 다 데리고 다녀주고, 지하철 타는 법, 등 체티나가 다 가르쳐줬거든요.“
마크 올리버는 정말 깜짝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체티나가? 내 작은 체티나가 정말 그랬다고?" 하더니 나와 체티나를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체티나는 장난꾸러기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크 올리버가 지하철에서 갑자기 허리가 꺾이도록 파안대소했다.
"장님나라에서는 외눈박이가 길 안내를 한다더니 그게 여기였구나!"
우리는 그 후에 내가 벨기에 출장 가서 다시 재회했고, 연말마다 소식을 주고받는다. 작년 12월 29일에 이메일이 왔다고 핸드폰에 떴다. ‘Best Wishes’라는 제목의 이메일. 나의 작은 체티나다.
[책과 인생 2023년 8월 356호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