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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씨 Feb 28. 2024

경계에 서다.

호르몬에 따라 기분이 이랬다 저랬다 하고 몸 상태가 바닥을 쳤다가 조금 나아지기도 한다. 취직이 되지 않았다면 혼자서 집에서 이리 고민 저리 고민을 했을 터이지만, 다행히도 취직이 되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노곤하다. 겨우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하면 한 시간 정도 자는 줄도 모르고 자는 일이 종종 있다. 

 딸의 침대에 누워본다. 매일 정리해 주는 아이의 침대엔 딸의 보드라운 기운이 아직 남아있다. 아이를 위해서 정리해 주었지만, 내가 즐겨본다. 

" 안경 벗지 마."

안경을 벗고 눈을 감으려고 하니 아이가 침대에서 나가길 요구한다. 얼굴을 보니 뭔 일이 있다. TXT 보이그룹의 콘서트가 금주 주말인데 티켓을 구하지 못한 사정에 몰두한 상황이다. 그냥 뭔 일 정도가 아니라, 큰 일이다. 팔다리가 침대에 달라붙어 있은 힘이 없지만 일단 자리를 피해 본다. 잠시 혼자 있게 놔두는 게 나을 때도 있는 법이다. 


거실 소파가 나의 자리다. 내겐 글을 쓰거나 몰입할 만한 방도, 책상도 없다. 잠도 거실에서 이불을 깔고 잔다. 오픈되어 있는 공간, 그래서 지나가던 아이도 남편도 뭐든 요구할 수 있는 소파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경계가 지워진 파스텔화처럼 내겐 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영역이 없는 존재, 그게 나란 인간인가 보다. 

 일 마치고 돌아와 꼼짝 할 수 없던 10분 전의 상태에 대해선 까맣게 잊고 아이의 기분에 합류한다. 기분도 감정도 일정도 나만의 영역이나 경계는 흐릿해져 버린다. 

" 밤양갱 만들러 가까?"

거실로 나와 빨래를 정리하고 노트북을 열어 검색을 하다 보니 떠올랐다. 아이를 북돋을 수 있는 방법은 비비의 밤양갱을 들으면서 밤양갱을 만드는 게다. 밤양갱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아이는 알밤처럼 방에서 튀어나온다. 딸의 기분을 바꾸는 건 쉽고도 어려운 일이다. 이것저것 시도해보려고 하면 쉽게만 느껴지지만 어쩌다 맞아떨어지면 성공 확률 100%다. 아이는 나와 공유하는 게 많아 나눴던 대화를 돌이켜 보면 실마리를 잡아낼 수 있다. 

긴 방학이 지나가는 동안 아이는 거실에서 바닥으로 꺼지듯 잠이 든 내 옆에 와 누운 날이 많았다. 시험이 시작되는 중2라는 시간이 걱정이 되어, 본격적으로 공부해 보겠다고 마음먹은 겨울 방학이었다. 걱정과 뿌듯함이 뒤범벅된 밤 11시 아이는 잠을 청하기 어려워 보였다. 10시가 되면 이미 졸림을 넘어서서 어지러워져서 소파와 가만히 한 몸이 된 나의 컨디션과는 차이가 큰 컨디션이다. 하지만, 아이의 상태가 느껴지고 잠을 청하기 어렵다는 것도 눈치챘으니 그녀를 기다려주기도 하고 반쯤 잠든 상태에서 아이 이야기를 들으면 ' 응응' 대꾸하곤 했었다. 잠 반, 아이의 이야기 반이었다. 


고속 터미널은 집에서 걸어 20분 거리다. 고작 20분이지만 퇴근하는 차, 버스, 배달 오토바이가 가득한 반포 시내를 걷고 있자면 남아있던 기운도 사라져 버린다. 밤양갱에는 팥앙금, 한천, 밤이 필요하다. 한 도심에서 밤양갱 재료를 어찌 구하냐고? 고속터미널엔 베이킹 재료가게가 있다. 밤양갱 만들어보고 싶다는 며칠 전 아이의 소리를 들었을 땐 생각이 나지 않던 베이킹 재료 가게가 오늘은 생각이 떠올랐다. 스스로가 어찌나 기특한지. 

티켓팅에 실패한 10대 딸의 드러누움을 해결하는 데는 시간은 걸렸지만, 결국 해냈다 싶다. 

경계에 서있나 보다. 아픈 사람과 건강한 사람 사이, 젊은 여자와 늙은 여자 사이, 엄마와 친구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걸어간다. 그렇게 나는 이것저것 해 나가면서 매일을 외롭고 치열하게 살아가나 보다. 경계인으로 이렇게 계속해서 나이 먹어갈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검은 고속터미널의 밤 10대의 내 아이들과 걷는 날이 올 것이란 예상은 하지 못했지만, 앞으로도 나라는 경계는 흐릿할 것만 같은 예감은 선명하게 떠오른다. 


사진: UnsplashMatt Seym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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