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멀미하잖아. 괜찮아?"
눈물이 고여서 눈이 무거워지길래 치켜떠서 창밖을 보니 두물머리엔 아직 벚꽃이 많다. 모든 것에는 제각각의 속도라는 게 있어서 제 아무리 벚꽃이라고 하더라도, 10년 넘게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더라도 꽃을 피울 수 있을 만큼의 해가 있어야 만개함을 누릴 수 있다.
50을 향해 가는 이때에 경력을 있는다고 취업을 한 데다 주변 동료들 평균 연령이 서른인데, 이들과 잘 지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했었다. 스스로에 대한 과대평가가 오늘의 지금 이 순간 나를 여기로 데리고 왔다.
7년쯤 되어 보이는 제네시스다. 독일에서 남편이 몰고 다녔던 세단처럼 스포츠 모드 전환이 가능하다. 애지중지 관리된 차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실내까지도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고, 차주인 대표도 제네시스를 애지중지하고 있다. 아마 대표 부모님들의 차 일 것 같다.
성격이 급한 줄은 알았지만 난폭운전을 할 줄은 몰랐다. 대표 옆자리에 앉은 연구팀장인 여자친구는 신이 난 눈치다. 국도를 속도 140 넘게 밟다 벚꽃놀이로 국도를 메운 차들 때문에 못 가고 멈췄다가 다시 급발진을 거듭한다. 길이 좀 열리면 치선변경을 계속적으로 하니 양평 가는 길이 고르지 않아 내가 탄 뒷자리는 웬만한 놀이기구 못지않다.
옆에 앉은 커머스팀 여직원을 얼굴을 살폈다. 서른도 되지 않은 그녀의 얼굴은 밝지 않다. 한마디 말도 없는 그녀의 굳은 얼굴과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을 더듬어보니 나나 잘 살아남아야겠다. 남편에게 연신 카톡을 보냈는데 답이 없고, 자다 일어난 딸이 엄마 어디냐고 묻는다. 내일과 모레 워크숍이 있다는 이야기는 해두었지만 아이는 기억하지 못했다. 그리고 딸의 오전 영어 학원 일정을 나 또한 기억하지 못했다.
가락 시장에 과일을 사러 간 아빠가 돌아오면 아침 챙겨 달라고 하라고 말을 하니 아이는 엄마의 멀미 걱정을 한다. 어디 카메라가 있는 걸까? 대표의 난폭 운전을 아이는 어떻게 아는 걸까? 카톡에 이 차의 운행 상태가 묻어나기라도 하는가 보다.
신입사원은 참을 일이 많았다. 술을 먹지 못하는데 술을 먹어야 했다. 술을 먹지 않겠다고 말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소주를 마시고, 옆에 물 잔을 하나두어 물을 먹는 척하면서 소주를 모두 뱉어 냈다. 어쩌다 옆에 앉은 팀장이 뱉어둔 소주잔을 먹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었다. 소주의 투명함이 참으로 고마운 시절이었다.
신입사원만이 아니었다. 성희롱에 가까운 말, 말이라도 이름 짓기도 멋쩍은 소리를 듣고 내 귀를 의심하던 날들이었다. 사장님이 쏜다며 모두 모인 점심식사 자리, 사장은 남자들이 축구나 축구공, 그 외의 여러 공들에 매료되는 이유가 공이 가슴처럼 생겨서가 아니겠냐고 했는데 당시의 분위기는 다들 듣고 있는 분위기였다. 여직원은 나 말고도 2명 더 있었던 듯하다.
그런 시절은 세월 속에 흩어졌고, 그런 말과 행동을 하던 이들은 여전히 일터에서 현직이다. 또 그런 사람들 만날 까봐, 내가 아니라 혹시 내 아이들이 만나면 어쩌나 싶은 걱정이 나를 쫓아다녔다. 그들이 나타나 그 자리가 다시 펼쳐지고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시선을 떨구는 장면을 수도 없이 꿈으로 재생했다. 악몽이었다. 땀을 흘리며 잤고 울며 일어났다. 마치 그 일이 다시 일어나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신입사원 시절을 되돌아볼 수 있는 정도의 음악이었다. 연구팀장의 선곡은 가사가 발랄 단순하며 80년대 풍의 가벼운 아이돌 음악이었다. 대표가 데이트하면서 많이도 들었는지 본인 취향의 노래 좀 틀어달라고 했다. 가벼운 음악도 머리 뒤 사운드 바로 나오는 통에 귀가 터질 듯했는데, 대표 취향의 힙합이 나오니 더 죽을 맛이었다. 생각을 할 수 없을 지경으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일찌감치 아침밥 챙겨 먹고 오길 잘했다. 이미 소화가 다 돼서 다행히 배는 안 아프고, 이 차를 이런 식으로 운전하다가 워크숍 가는 길에 동료들과 오늘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식은땀만 났다.
딸아이에게 새로 나온 카카오 이모티콘을 보냈다. 딴 소리를 했다. 멀미는 아무렇지도 않아. 엄마는 이제 나이가 드니 멀미도 사그라들고 생리통도 줄어들었단다, 아이야. 엄마도 너처럼 젊고 예쁘고 피어나듯 자라던 시간들이 있었는데 그땐 모든 것들이 총 천연색이었다. 먹고 싶은 게 많았고 먹고 싶은 걸 먹어도 배 아프지 않았다. 멀미가 심했고 술을 먹으면 토마토처럼 빨갛게 되었으며, 생리통은 이틀을 꼬박 누워있어야 할 만큼 심했다.
그런 시간이 있었다. 오늘의 나는 반백을 향해가고 있는지라, 서른의 대표가 모는 난폭운전 제네시스 속에서 힙합을 들으면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2시간을 달려 중간지점에서 식사를 하고 나오니 대표가 모두를 향해 자신의 운전 솜씨를 뽐낸다.
"대표님, 완전 난폭 운전! **님 괜찮았어요?"
옆에 앉았던 여직원에게 물으니 아무 말도 못 했다. 자긴 좋았단다. 그래, 그럼 넌 계속 타렴. 난 도망가련다. 이젠 더 이상 시선을 떨구며 참지는 않는 정도에 이르렀기에 도망갈 궁리를 모색한다. 개발팀 직원이 몰고 온 직원의 아버지 차가 좋아 보인다.
"제 차는 천천히 갑니다."
알지 알지. 백엔드 담당자와 의사소통 해오면서 이 친구는 난폭운전은커녕 속도 제한을 모두 맞춰가며 운전한 것이란 걸 이미 예감하고 있기에 짐가방은 대표의 제네시스에 남겨두고 살겠다고 차를 옮겨 탄다. 그만 참아야지. 이젠 그만 비겁해지자. 듣기 싫은 소리 그만하라고 말할 용기와 싫다고 소리 지를 기운 탑재하고 일터로 나서자. 멀미하는 엄마를 걱정해주는 딸아이의 내일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