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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씨 Nov 05. 2024

침묵의 주재원

 남편은 책을 읽는 사람이 아니다. 글을 쓰지도 않는다. 결혼하자마자 그가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으로 선택하는 방법이 침묵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사실 절망이 컸다. 살면서 좋은 날보다 힘든 날이 훨씬 많은데, 함께 나란히 걸어갈 길은 봄볕보단 불볕더위와 혹한의 날씨가 펼쳐질 터인데 과연 그의 침묵과 나의 주절거림이 공존할 수 있을까를 확실할 수 없었다. 

 지난주 손 앞에 잡힐 듯 선명하던 주재 발령이 이번 주는 한 걸음 멀어졌다. 미 대선보다 알 수 없는 게 유럽 발령이고 임원급인 유럽 법인장 임명이다. 해리스도 나보단 덜 떨릴 것이고, 트럼프가 졸이고 있을 심장은 우리 남편의 심경보다 못할 것이다. 미국 대통령이고 나발이고, 특검이고 탄핵이고 간에 우리 부부에겐 안중에도 없다. 우리는 다음 주 초반에 있을 독일행의 확률만을 바라보고 있다. 

 남편은 주말엔 부산행, 주중엔 울산 공장행이다. 저녁엔 골프 연습과 산책으로 집을 비우고 낮엔 일하니라 카톡 한 줄이 없다. 그의 침묵이 짙어질수록 나의 생각은 더 많아진다. 

 

"사장님이 출근을 안 해."

인사에 대한 회장님과 사장님의 갈등이 심해져 사장님이 출근을 안 하신단다. 사장님이 안 나오시면 임원 발령은 오리무중이 된다. 임원 발령뿐이겠는가? 최고 책임자가 없으면 다들 우와좌 와이다. 울상은 지었지만 저녁밥은 두 그릇 먹은 남편이 내게 오래간만에 건넨 한 마디였다. 

그는 한 마디를 건네고, 나의 머릿속은 수백 수천만 가지의 상상으로 가지를 가득 찬다. 머릿속을 정리하려면 말을 하든 글을 쓰든 해야 하는데, 남편은 그 무엇도 들을 수가 없는 상태다. 어떤 말을 하든 이미 침묵으로 빠져들어갈 준비가 된 그 앞에서 대화는 물거품이고, 건넨 말은 반사되듯 퉁겨 나온다. 

 이럴 땐 내 입과 귀를 막는다. 그를 만난 지 20년 차다. 무엇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지 잘 알고도 남는다. 달라도 너무 다른 생각의 속도를 서로 맞추기 위해선 각자의 시간이 필요하다. 섣불리 내 속도를 강요하거나, 그가 나에게 자신의 속도에 대한 이해를 구하면 싸우게 마련이다. 답답해서 그에게 소리를 지르고 독촉을 한다. 남편 또한 속 터지니 가만있으라고 하기도 한다. 넷플릭스가 제격이다. 


잘 준비를 하는 남편 옆에 앉아 노트북을 켠다. 넷플릭스와 이어 버즈면 만사 해결이다. 캐리 러셀은 연기천재다. 그녀가 드라마 제작에도 참여했다. 제작도 천재다. 남편이 가만히 옆으로 와 골프 채널을 유튜브로 본다. 

"사장님이 안 나오셔서 다들 난리야."

그의 문장이 조금 더 길어졌다. 사람들이 요새 어떻게 지내고 어떤 기분을 느끼는지가 첨가되었다. 말하고 싶은 눈치다. 

"아, 그렇겠다."

'그랬구나'는 사실 실용적 임의 최고봉이다. 나는 남편에게 20년의 절반정도에 걸쳐 "진짜?", "그러네."이 두 마디로 아내와의 대화가 원활해지고 사이가 가까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누누이 알려주었었다. 오늘은 내게 써먹을 차례다. 

"진짜? 그렇겠네. 난리겠네."

그의 말을 반복하고, 감탄사를 붙인다. 더는 말이 없이 골프를 본다. 그는 골프를 보는 게 아니다. 스스로를 보고 있다. 자신을 돌아보고 다독거리는 중이다. 나 또한 그렇하다. 왜 아니겠는가? 침묵에 빠져들지 않는 그가 고맙고 기특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진도는 여기까지다. 여기서 그에게 중언부언해본들 그가 침묵을 깨고 스스로의 감정을 서술하는데 무슨 도움이 될까 싶다. 

 넷플릭스를 보며 가만 기도해 본다. 언젠가는 그의 입에서 자신의 감정을 담은 문장이 나올 그날을 바란다. 10년이든, 20년이든, 살아있다면 30년 후에라도 그가 내게

"오늘은 힘들었어. 나 오늘은 지내기가 어렵고, 혼란스러웠어." 

라고 말하며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길 빈다. 

사진: Unsplashbharath kum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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