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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씨 Nov 11. 2024

잘 지내고 있어요.

 친정 엄마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안다. 날이 추워지면 뿌리채소가 먹고 싶어 진다. 연근, 더덕. 이번주에 생리가 터지고 지난주 내내 복통과 설사, 허리 통증으로 고생한지라 회사로 매일 싸가던 도시락은커녕 식구들 끼니 챙기기도 쉽지 않았다. 엄마한텐 입도 벙긋하지 않았는데, 엄마는 어떻게 더덕을 까서 누르고 양념에 재어두었는지 신기할 노릇이다. 

 가만히 엄마가 싸준 더덕을 씹으니, 굳었던 어깨가 풀리고 뭉쳤던 등이 펴진다. 지난주 내내 혼자 쌓아두었던 울음이 쌉싸름한 더덕 덕분에 씻겨 내려간다. 친정엄마에게 힘든단 말을 하긴 어렵다. 엄마는 더 힘들었을 거 같고, 엄마는 내게 힘들지 않길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아들이 침대에 붙어 있던 그 시간들처럼, 남편이 유튜브를 끼고 방에 처박힌 시간들처럼, 내게도 헤어 나오지 못한 무기력함과 우울함의 시간이 있었다. 한 번 중독되면 헤어 나올 수 없는 게 게임이나 술, 마약 뿐만이 아니다. 내게 제일 무서운 건 우울증이다. 

 동생의 공황발작과 우울증, 신경쇠약은 친정 엄마를 계속 따라다니는 중이다. 동생이 방에 누워있어도, 그녀가 입원을 하고도 엄마는 약국으로 출근을 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날도 출근을 하셨다. 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일, 일로 돌아가는 아빠의 마음을 지난주 내내 읽을 수 있었다.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통사정하는 아들과 유럽에 나가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남편, 그 둘 사이에서 버겁지만 딸에겐 그 무엇도 짐 지워주고 싶지 않아서 다물고 있었던 내 입. 이 모든 것들이 버거워 자꾸 일을 했다. 기계처럼, 감정을 느낄 수 없는 로봇처럼 일로 돌아가면 감정이 사라진다. 그리고 일을 마치면 두통이 떠밀려왔다. 1년을 채운 최저시급의 내 일은 기계적이고 반복적이며 그 어떤 창의력도 필요하지 않는다. 그러니 시간을 보내기엔 좋지만 키보드에서 손을 내려놓고 스크린을 끈 순간 더 큰 두통이 밀려온다. 



 

수없이 보았던 육아서들, 좋은 대학에 자식을 보낸 엄마가 쓴 그 많은 책들은 오늘의 내게 도움이 되지 못하며 위안이 되지 못한다. 실수하고 실패하며 처절히 가슴을 쥐어뜯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엄마가 지금의 내가 읽어야 할 책이다. 

 그래서, 엄마에게 기껏 전화해서 또는 눈물을 닦고 운 얼굴을 세수하고 목소리를 높여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엄마가 부쳐준 김치부치개를 신나게 먹는다. 

"사실 지난주 내내 뭘 먹을 수가 없었어."

이 말을 내뱉는 대신에 엄마와 동생이 사 온 닭강정을 꾸역 먹고, 양껏 먹고, 잘 먹는 모습을 보여주는 걸로 친정 나들이를 마무리한다. 집에 돌아와 소화제를 먹을지언정 내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친정에서 재잘재잘 떠들다가 돌아온다. 

 자식 걱정하지 말고, 자식의 미래를 기대하며 믿으면 좋은 대학을 간다더라며 쓴 어느 엄마들의 책 속엔 눈물이 한 방울도 닮 겨 있지 않다. 피도 눈물도 없이 그저 책을 내기 위해서 써 내려간 육아 공식과 양육에 대한 훈계는 이제 단 한 글자도 받지 않을 예정이다. 

 동생이 오래간만에 만난 아이들을 보면서 놀리고 있다. 엄마는 여전히 엄마 노릇을 하고 있다. 마흔 중반이 된 딸을 아직도 데리고 있고, 그 딸을 아마 내내 데리고 있어야 할 듯하니 엄마는 길게도 엄마라는 업을 짊어지고 있다. 다들 쉽게들 대학 가고, 별일 없이 잘만 사는데 나만 이리 괴로우니 '엄마'와 '아내'이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 내 인생에 꽃길이 올 것이라 추측하는 한 주였다. 

 엄마에게 힘들다고 고백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애벌레 앞에서 주름을 잡지 않듯, 엄마에게 징징거리지 않아야 한다. 하던 대로 하자고 마음먹는다. 별일 없다며 엄마에게 큰소리칠 때마다 정말 별 일이 없어질 것이란 걸 안다. 내겐 아무 일도 별 일도 없다. 큰 아이는 학교에 갔고, 남편은 출근을 했다. 비록 학교에서 사고도 치고 자퇴하겠다는 말을 밥 먹듯이 하지만 별일 없는 거다. 남편은 스트레스받는다는 핑계로 몰래 담배를 피워대고 주말은 방에 쳐 박해 12시간을 자고 유튜브 속으로 빠져들고 있지만 별일 없는 거다. 

 생리는 이번주에 터졌고, 금요일쯤이면 내 소화력도 돌아올 것이다. 잘 먹고 잘 싸고 잘 지낼 것이다. 그러니, 별일 없는 게다. 엄마의 더덕과 5종의 김치를 받아왔으니 더욱이 나는 잘 지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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