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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소매 붉은 끝동

정조와 의빈 성씨의 마지막 글

by 나노 Feb 17. 2025

이준호는 2PM에서 늦게 빛을 본 캐릭터다.

눈웃음이 매력적이지만 워낙 짐승돌로 인식이 강해서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다 ‘우리 집으로 가자’ 짤이 인기를 모으면서 과거 영상들이 사랑을 받았다. 그래서 군대를 다녀온 뒤로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 사실 그전에 드라마 ‘김 과장’에서 서율 캐릭터로 눈도장을 찍었었다. 그러다 남친 짤이 돌았고, 어느 날 보니 ‘나 혼자 산다’에 나와서 운동하고, 젓가락 연습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맡은 배역 때문에 콩을 젓가락으로 집는 연습을 꾸준히 하는 것을 보고, 아마도 고전 사극에 나오나 보다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옷소매 붉은 끝동’이었다.


드라마에서 ‘정조’는 너무 많이 등장해서 좀 식상했다. ‘이산’이라는 드라마로 이미 대중의 뇌리에 ‘이서진’으로 박혀 있는데, 이준호가 다시 그 역할을 맡는 것은 잘해야 본전 느낌이었다. 다만 깔끔한 외모와 묘한 매력 때문에 첫 방을 본방사수 했었다. 여주인 이세영은 뭐 말하지 않아도 로코의 달인이니... 맛보기 느낌으로 살짝 발을 넣었었다. 그런데 사실 아역 연기에 마음을 홀딱 빼앗겼다.


생각시인 덕임이 영빈자가의 조문을 갔다가 어린 동궁 산이를 만나는 대목.

한밤중에 몰래 조문을 온 아이들이 갑자기 방문한 호랑이 영조와 마주치는 장면, 그곳에서 덕임은 영조의 마음을 움직였고 하사품으로 ‘여범’을 받는다. 당돌한 아역의 눈빛도, 연기도 사람의 마음을 홀리기 충분했다. 그 뒤로는 뭐 고구마 줄기를 타고 들어가듯 매주 본방을 찾아보았다. 뻔히 안다고 생각한 역사적 사실에 드라마적 요소가 가미되어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맛이 참 좋았었다.


 정조는 덕임에게 두 번이나 까였다고 한다. 감히 궁녀가 동궁의 아니 왕의 손길을 거부할 수 있다니!! 불가능한 스토리다. 그런데 그 불가능이 사실이었고, 심지어 정조는 평생 그 궁녀만을 사랑했다고 한다. 이런 불가능한 러브스토리를 증명하는 것이 ‘어제의 빈묘표지명(御製宜嬪墓表誌銘)’이다. 국왕이 죽은 후궁의 묘표와 묘갈명을 직접 지어 당대 명필로 이름 높던 이들이 글씨를 쓴 것! 이것으로 그 사랑은 증명이 된다. 조선시대 임금이 직접 묘지명을 짓는 것은 자신의 모친 또는 딸(공주)에 그친다. 그런데 하물며 아내에게? 쉽지 않은 일이다. 이례적인 글이다. 남다른 애정사도 그렇지만, 의빈 성씨의 생애가 기구하고 안타까워서 더욱 이 글이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정조의 첫 번째 후궁으로 문효세자(1782~1786)의 생모이다. 어릴 때 궁으로 들어와 혜경궁의 궁인으로 있었다. 정조의 눈에 들어 1782년(정조 6) 왕자를 낳아 소용에 봉해졌다. 이듬해 의빈이 되었고 1784년(정조 8) 소생 왕자가 문효세자에 책봉되었다. 1784년(정조 8)에 옹주를 낳았다. 1786년(정조 10) 문효세자가 홍역을 앓다가 죽었고, 같은 해 셋째 아이가 복중에 있을 때 의빈 성씨가 사망하였다.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장서각)


 


 


박복하다, 박운하다는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처절한 생사의 이별로 점철된 생이라 할 수 있다. 위대한 사랑을 받았지만 뿌리하나 남기지 못하고 떠난 삶이라니. 남의 자의 애통함은 말할 것 없을 것이며, 떠나간 자의 울울함도 감히 상상조차 어렵다.

아! 정조가 후궁에게 행장을 써준 적은 있다. 후궁 원빈 홍 씨가 간택된 지 1년 만에 사망하여, 『어제인숙원빈행장(御製仁淑元嬪行狀)』을 직접 지었다. 다만 의빈 성씨는 제문과 묘지, 묘표를 직접 작성하였고, 부인과 아들을 잃은 각별한 심정과 비통한 심회를 담았기에 더 유의미하다. 정조의 ‘어제의빈묘표지명(御製宜嬪墓表誌銘)’ 중에서 ‘사후 의론’과 ‘명’을 인용하여 그 애달픔을 엿보고자 한다. 사후 의론은 타인의 입을 통해 정조가 드러내고자 하는 의빈 성씨의 인품일 것이고, ‘명’은 이 글의 주제가 집약된 요약문이라 상징적인 면모를 살필 수 있다.


 


 


빈의 출신은 가난하고 지체가 변변치 못하여 스승에게 배우지 못하고 후궁이 되었지만 학문을 배우지 않아도 알았다. 내전(효의왕후)을 위해 힘과 마음과 정성을 다한 것은 하늘과 땅이 마땅히 알고 금석(金石)도 가히 뚫을 수 있을 것이다. 빈은 높음과 귀함, 임금의 은덕을 입은 영광을 즐거움으로 삼기에 거듭 부족하다고 했다. 마음에 잊히지 않는 정성으로 매우 간절히 청하며 반드시 내전에게 정성을 다하겠다고 하며 더구나 장차 상심하고 슬피 울면서 평생 동안 내전을 따르겠다고 지극히 바랐다. 비록 옛날에 죽음을 무릅쓰고 간언 하는 충정이지만 배에 칼을 꽂은 정성도 이에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빈은 덕을 실천하고 지키는 마음은 그 무엇과도 섞이지 않고 온전히 드러냈으니 이는 본디 그대로의 것에서 드러났음을 경험할 수 있다. 이에 마땅히 낳은 어진 아들은 영광된 왕세자가 되고, 공을 세워서 국세가 태산과 반석처럼 편안하고, 경사로이 자식을 길러 왕족이 번창되어야 할 터인데 나라의 운세가 불행하고 신의 이치가 크게 어그러져 갑자기 올해 여름 문효세자가 죽은 변이 있었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뱃속에 있는 아이와 하루아침에 죽었으니 빈의 흔적은 장차 이 세상에서 아주 사라질 것이다. 이 뛰어난 언행을 내가 글로 적지 않는다면 누가 그것을 전하고 알려서 아주 사라지는 것이 애석하다고 하겠는가? 이는 빈에게 한이 되고, 문효세자에게도 한이 될 것이다. 이에 대략 찬차(撰次)하였는데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이 글이 길어졌다.(출처:위키백과)


 


 출신은 미천하나 현명하였고, 윗전을 정성으로 섬겼다. 그러니 자질과 성품이 충분한 사람이었다. 다만 자식을 먼저 잃는 변고로 복중 태아까지 잃어 ‘흔적조차 사라질까’ 두려워했던 것이다. 죽은 아들조차 제 어미의 인생 족적을 잃는 것을 한스러워할까봐 본인이 직접 글로 남긴다는 회고이다. 사실 이는 정조 본인의 염려이고 한일 것이다. 사랑하는 이를 너무 일찍 잃어버린... 이 글에서 망자의 성품으로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정성과 충심’이다. 정성을 다한다는 것은 온 마음을 쏟아 섬긴다는 뜻이다. 그것은 심중에 다른 뜻이 전혀 없이 오로지 한 대상만을 담는다는 의미이다.

성심.

수많은 드라마 속에 표현된 후궁들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오래전 드라마지만 ‘여인천하’가 후궁들의 암중혈투를 노골적으로 보여준 작품이다. 그런데 궁은 그런 곳이 아닌가? 옷소매 붉은 끝동은 모두 왕의 여인이니, 그 넘쳐나는 여인들 속에서 살아남는 것은 전쟁이었을 것이니. 그 전쟁 속에서 홀로 윗전을 섬기며 ‘평화협정’을 맺은 후궁이라! 쉽지 않다. 심지어 슬하 자손이 없는 ‘효의왕후’를 진심으로 모시고 섬긴다는 것은 따뜻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왜냐하면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그 선한 성품이 하늘의 복을 받아 자손 대대로 창대하기를 바라는 것이 당연지사인데, 그 운세가 꺾였다면... 그것을 보는 자의 슬픔은 어떠했을까? 그러니 직접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한 토씨도 놓치지 않고 담아주고 싶었을 것이다. 글은 망자를 위로하는 힘이 있으니. 대대손손.


 

 


하늘을 따라 정중하게 행동하고 말을 하면 사람을 감동하게 했다. 몸은 정중하게 행동하고 입은 극진한 말을 했으나 복록이 은덕에 보답을 받지 못한 것은 아마도 운명인가 보다. 저 고요한 율곡의 언덕은 문효세자가 잠든 곳이니 영원토록 서로를 지켜줄 것이다. 생각하건대 멀고 오랜 세월 동안 배회하며 탄식하고 근심할 것이다.(출처:위키백과)


 


묘지문에서 ‘명’은 작품의 요체이다. 윗글을 없어도 명으로 주제를 응축할 수 있는 알집이라고 할까?

이 글의 시작에도 ‘천리에 순종하고 언행이 바르고 사람을 감동하게 했다’고 한다. 역시 의빈은 ‘감동=정성’이다. 기박한 운명을 애석해하며 아들과 함께 잠들 수 있게 배려한 것이, 정조가 유일하게 해 줄 수 있는 이었을 것이다. 하여 ‘오랜 세월 배회하며, 탄식하고, 근심할 것이다’라는 마을 통해, 현재 글 쓰는 이의 심정을 담아내었다. 평생 잊지 못하고 한탄하며 염려할 것이라는...

사랑했다 은혜한다는 말보다 오랜 세월 염려한다는 말이 더 진정성 있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일까?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마지막 회가 가슴 먹먹했던 기억이 뚜렷하다. 생인지 사인지, 현실인지 꿈인지 모를 공간에서 그리워하던 이를 만나 하소연하는 정조의 모습은 애잔했다. 그런데 실제 묘지명을 읽으면 그 슬픔이 더 곡진하다. 죽은 아내와 아들이 서로를 지켜줄 것이라는 말이,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사과로 들리는 것은 나뿐인가?



‘이산’이 서사로 재미를 줬다면, ‘옷소매 붉은 끝동’은 서정으로 감동을 준 드라마다. 다음에 또 누군가가 정조를 연기한다고 하면, 나는 이준호의 그윽한 눈망울이 먼저 생각 날 것만 같다. 이런 재생이 망자들을 위로하는 또 다른 방식일 것이라, 제3, 제4의 정조와 성덕임을 기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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