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걸까. 결과는 그것을 향한 열망이 어느 정도 식은 뒤에야 따라오는 걸까. 아직 때가 되지 않은 일은 아무리 바라고 시도해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다 마음이 조금 내려앉은 뒤에야 결과가 나타나는 경우를 여러 번 경험했다. 어쩌면 내 인생의 대부분은 그런 패턴으로 흘러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글을 쓸 수 있는 시기에 있는 걸까.
맨해튼에서의 마지막 일정으로 센트럴파크를 걸었다. 회색 빌딩의 숲과 대비되는 녹색의 공원이 도시 한가운데를 압도하고 있었다. 끝없이 공원으로 유입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 사회와 연결되어 살아가고 있을까 생각했다. 동시에 나는 글을 통해 사회와 다시 연결될 수 있을지 불안했다. 지금이 글을 쓸 수 있는 때인지, 혹은 결과를 내고 싶은 욕망이 아직 너무 뜨거운 시기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고작 한 달 차 백수가 품기엔 조금 건방진 고민이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말없이 공원을 걸었다.
내일부터는 아내의 출장 일정이 시작된다. 그녀는 향수 브랜드로 유명한 회사에서 직원을 교육하는 일을 한다. 그 회사의 본사 중 하나가 뉴욕에 있다. 뉴욕은 다섯 개의 구로 이루어져 있고, 아내가 묵을 호텔은 맨해튼에서 강을 건너면 있는 브루클린에 있다. 오늘이 센트럴파크를 찾을 마지막 날이었다.
센트럴파크에서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 있었다. 바로 서쪽에 자리한 ‘스트로베리 필즈(Strawberry Fields)’였다. 이곳은 비틀스의 멤버였던 존 레넌을 기리는 공간이다. 그는 1980년 12월 8일, 바로 이 공원 옆 다코타 아파트 앞에서 피살되었다. 생전에 그는 이 일대를 자주 산책했다고 하니, 이곳에도 그의 발자국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를 기념하는 장소의 바닥에는 ‘IMAGINE’이라는 단어가 모자이크로 새겨져 있다. 그의 노래처럼 이 단어는 평화와 연대, 그리고 기억의 의미를 품고 있다.
나는 외국계 기업에서 일해온 탓에 영어 이름이 필요했는데, 그때 선택한 이름이 ‘John’이었다. 사실 그 이름은 존 레넌의 영향이 컸다. 그가 노래한 이상과 남긴 삶의 궤적이 내게 강한 울림을 주었다. 평범한 직장인이면서도 그 이름으로 나의 정체성을 쌓아가고 싶었다. 그런 내가 뉴욕에 와서 그의 흔적 앞에 앉아 있으니, 이 자리에 오지 않을 수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추모하려 모인 사람들 사이에 앉아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가 상상했던 세상을 떠올렸다. 국가도, 국경도, 종교의 분파도, 물질적 소유도 없는 세상.
그와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지만, ‘실존’, ‘인간과 제도 사이’, ‘나답게 사는 것’이라는 주제만큼은 어쩌면 같은 이상을 향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브루클린에서 심호흡
브루클린으로 옮겨 갔을 때, 같은 뉴욕시라도 이렇게 분위기가 다를 수 있구나 싶었다. 맨해튼에서의 며칠이 도시의 맥박을 온몸으로 느끼는 시간이었다면, 브루클린에서의 하루는 훨씬 느린 호흡으로 흘렀다. 호텔이 자리한 거리는 회색빛의 빌딩 숲과는 다른 색을 띠고 있었다. 건물들은 낮고, 골목마다 나무가 서 있었다. 사람들은 서두르지 않았고, 상점의 문도 대부분 열려 있었다. 커피 내리는 소리와 자전거 체인의 금속음,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던 버스의 굉음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강남에서 북촌이나 성수로 옮겨온 듯한 기분이었다. 첫날에는 숙소 근처의 동네 펍에 들렀다. 맥주 한두 잔으로 저녁을 대신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내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마침 NBA 플레이오프에서 뉴욕팀이 출전한 날이었다. 우리가 들어간 곳은 단순한 펍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이 모여 지역 팀을 응원하는 대표적인 스포츠 펍이었다. 대형 스크린 앞에서 쏟아지던 함성은 거의 국가대표 경기를 보는 듯했다.
바 좌석에 앉아 있던 나와 혜진은 옆자리의 현지 여성 덕분에 자연스럽게 응원의 물결에 합류했다. 그녀는 과격한 제스처로 응원을 주도하던 여인이었다. 경기는 짜릿한 역전승으로 끝났고, 그 열기에 취한 우리는 맥주와 칵테일을 잇따라 주문했다. 평소라면 비싼 물가 탓에 두 잔 이상 마시지 않았겠지만, 그날은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그대로 잠들었고, 이른 새벽에야 찝찝한 기분으로 깨어 샤워를 했다. 짐 속에 챙겨 온 라면밥 짬뽕맛을 꺼내 끓였다. 뉴욕에서 처음 겪은 숙취였는데, 그 라면이 없었다면 어쩔 뻔했을까 싶었다. 경기에 이기고 수없이 건배를 주고받던 어제저녁이 조각처럼 떠올랐다. 여행 일주일째, 해장국의 얼큰한 국물처럼 집이 그리워지기 시작했었다.
미국의 공기는 다른 시공간의 그리움까지 불러냈다. 군대 시절, 미군 레스토랑에서 매달 한 번 열리던 ‘윙나잇(Wing Night)’이 떠올랐다. 닭날개 요리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날이라, 가난했던 카투사들에게는 작은 축제였다. 뉴욕에 오니 그때 생각이 나서 치킨윙을 이틀에 한 번꼴로 찾곤 했다. 혜진이 치킨을 좋아한 탓도 있었지만, 어쩐지 그 시절의 허기를 다시 채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브루클린에서도 자연스럽게 치킨윙 맛집을 찾았다. 마침 그날은 ‘치킨윙 데이’라며 열 조각에 열 달러 행사를 하고 있었다. 혜진은 서로 다른 맛으로 두 접시를 주문했다. 접시를 가득 채운 치킨윙을 보자, 군대 시절 윙나잇의 단골이던 맞후임 선욱이가 떠올랐다. 한국 시간으로는 이른 아침이었지만, 사진을 찍어 보냈더니 곧 답장이 왔다. 미국에 와서인지 카투사 시절이 유난히 그리웠다. 함께 지내던 미군 전우들이 생각났고, 식당 한쪽 구석에서 누군가 “헤이, 킴!” 하고 불러줄 것만 같았다.
하루는 브루클린에서 지하철을 타고 모마(MoMA) 미술관에 갔다. 낡은 의자와 어두운 터널, 약간의 오줌 냄새가 섞인 공기는 내가 상상하던 뉴욕 지하철의 모습 그대로였다. 인상주의 그림으로 미술을 좋아하게 된 나는,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을 다녀오며 언젠가 뉴욕의 모마에도 꼭 가보겠다고 다짐했었다. 그 다짐을 한 지 여덟 해 만에, 드디어 그곳에 서 있었다.
기대하던 고흐와 모네의 그림이 눈앞에 걸려 있었다. 비교적 한적한 시간대에 찾아가 한참을 그 앞에 고요히 서 있었다. 마침 소풍을 온 듯한 어린아이들이 작품 앞에 누워 크레용으로 그림을 따라 그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나도 모르게 미소가 났다. 전시는 시대별로 구성되어 있었고, 나는 인상주의에서 초현실주의로 이어지는 공간에 오래 머물렀다.
그중에서도 ‘안민정’이라는 한국 작가의 자화상이 눈에 들어왔다. 나보다 한 살 어린 작가의 이름 옆에는 “MoMA 소장”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 문장을 보는 순간, 이곳에 자신의 작품이 걸리는 창작자의 마음이 어떨까 상상하며 부러움을 느꼈다. 그렇게 미술관을 나서며, 오르세에 이어 모마까지—내 미술관 버킷리스트가 완성된 날이었다.
브루클린에서의 마지막 날, 업무로 바쁜 혜진을 숙소에 두고 혼자 걷기로 했다. 윌리엄스버그에서 브루클린 브리지까지 왕복 14킬로미터를 걸었다. 방과 후 스쿨버스에 오르는 아이들, 거리를 달리는 러너들, 저녁 찬거리를 사는 주민들, 가게 문을 여는 상인들. 지구 반대편에서 온 여행자에게 그 모든 일상이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차갑고 팽팽했던 맨해튼보다 브루클린의 공기에는 사람들의 체온이 묻어 있었다. 여행이 일주일쯤 지나자 생경하던 도시에 정이 붙기 시작했다. 센트럴파크를 제외하면, 늘 분주하게만 느껴지던 뉴욕과 달리 브루클린에는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서울의 민철이 형이 말했던 것처럼, 떠날 날이 다가올수록 묘한 아쉬움이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