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읽는 『상실의 시대』
어떤 소설은 읽고 나면 오랫동안 잔향이 남는다. 그 여운이 깊을수록 이어지는 나의 사유는 자연스럽게 소설의 문장을 닮아가고, 인물의 사소한 몸짓이 나의 일상에 스며든다. 나에게 그런 책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다. 나는 이 소설을 이십 대에 처음 읽었고, 삼십 대에 두 번 다시 읽었으며, 사십 대에 들어 세 번째 책장을 넘겼다. 다섯 번이나 되풀이해 읽을 만큼의 걸작인가에 대해서는 솔직히 망설여진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내게 특별하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나는 주인공인 와타나베를 통해 오래도록 품어 온 감정 하나를 인정받은 기분이 들었다. 늘 내 안에 있었던 외로움을 굳이 지워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그때 나는 처음으로 배웠다. 시간이 지나 그것이 ‘외로움’이 아니라 ‘고독’이라는 이름을 가진 감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삶이 조용히 가라앉는 순간마다 이 책을 다시 펼쳐 들었다. 그렇게 나는 마흔넷을 바라보는 올해 11월, 이 소설을 다섯 번째로 다시 읽었다.
이 소설이 쓰인 시대는 일본의 1960년대다. 1982년에 태어난 나는, 사회적 격변이 개인의 일상을 완전히 뒤흔드는 시대를 직접 겪지는 않은 세대다. 그래서인지 예전에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도 배경이 되는 시대를 깊이 의식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다시 읽을수록, 이 작품은 결코 개인의 이야기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에 담긴 ‘상실’은, 등장인물 몇 명의 비극만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종류의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시대 전체가 공유했던 균열에 가까운 감정이다.
1960년대 후반의 일본 사회는 혼란과 성장, 좌절이 동시에 일어난 시기였다.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세대가 대학생이 되면서, 이전 세대와는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누구인가”, “이 나라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같은 질문들이었다. 대학은 자주 폐쇄됐고, 학생들은 바리케이드를 치고 학교를 점거했다. 거리에는 구호와 최루탄 냄새가 남아 있었지만, 동시에 일본 사회는 눈에 띄게 부유해지고 있었다. 삶은 편해졌지만, 마음은 더 불안해졌다. 풍요는 찾아왔지만, 삶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틈에서 사랑은 쉽게 부서졌고, 죽음은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이 모순된 감정들의 뒤엉킴이 이 소설의 골격이었다.
이 시기를 한국의 시간으로 옮기면, 1987년 이후 1990년대 초반 대학가와 닮아 있다. 거리에는 여전히 시위의 잔향이 남아 있었고, 누군가는 승리를 말했고, 누군가는 허무를 말했다. 거대한 이야기가 끝난 자리에 개인의 이야기가 남기 시작한 시간이었다. 나는 그 시기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세대는 아니지만, 2001 학번으로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오랜 시간을 방황하며 보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삶과 죽음, 사랑과 고독 같은 말들에 오래 머물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상실의 시대』 속 인물들이 느끼던 불안과 고독, 특히 죽음 너머에 남겨진 사람들의 텅 빈 시간에 알 수 없는 친밀감을 느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감정은 모르는 사이, 성인이 된 내 정체성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상실의 시대』는 사건보다 사람을 따라가는 소설이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와타나베 토오루가 있다. 그는 조용하다.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는다. 가장 가까웠던 친구 기즈키의 죽음 이후, 그는 살아 있으면서도 어딘가 멈춰 선 채로 시간을 견딘다. 대학에 들어가 도쿄에서 생활하지만, 삶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는 숨은 쉬지만, 살고 있다는 감각을 느끼지 못한다. 나오코를 사랑하지만, 그녀를 온전히 끌어안지 못한다. 결국 그는 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남아버린 사람으로 소설을 끝까지 걸어간다.
기즈키는 이야기의 시작이자 끝이다. 그는 오래 머물지 않지만, 끝까지 지워지지 않는다. 밝고 자연스럽게 존재했지만, 아무 설명 없이 떠난다. 그의 죽음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이 세계를 갈라놓는 균열처럼 작동한다. 와타나베의 고독은 여기서 태어나고, 다른 인물들의 상처도 여기서부터 번진다. 그는 사라졌지만, 모두의 시간 속에 계속 남아 있다.
나오코는 가장 조심스럽게 무너지는 인물이다. 기즈키의 연인이었고, 동시에 가장 깊이 상처받은 사람이다. 감정이 섬세한 만큼 삶을 견디는 힘은 약했다. 와타나베와 가까워지지만, 그의 세계로 건너가지 못한다. 산속 요양소에서 자신을 지키려 하지만, 끝내 자신을 잃는다. 그녀는 누구보다 사랑을 원했지만, 끝내 혼자 남는 길을 선택한 인물이다.
미도리는 이 소설의 유일한 생기다. 그러나 그녀는 가볍지 않다. 병든 아버지를 돌보며 밝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마음 한쪽은 이미 오래전부터 상처가 덧나 있었다. 그녀는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좋아한다고 말하고, 싫으면 싫다고 말한다. 살아 있으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이다. 나오코가 죽음 쪽으로 가라앉았다면, 미도리는 끝까지 현실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와타나베를 붙잡고 살 쪽으로 끌어당기는 유일한 손이다.
레이코는 무너진 이후에도 남아 있는 사람이다. 과거에 피아노를 가르쳤고, 누군가의 악의 앞에서 삶이 부서졌다. 감정을 과장하지 않는다. 이해하려 애쓴다. 나오코를 지키고, 와타나베를 받아들인다. 소설 후반부, 그는 위로를 말하지 않는다. 대신 함께 버티는 법을 보여준다. 이 소설이 완전히 절망으로 가라앉지 않게 붙잡는 마지막 손잡이 같은 존재다.
나가사와는 이 세계의 냉혹함을 상징한다. 그는 똑똑하고, 유능하고, 야망이 있다. 세상을 감정이 아니라 전략으로 본다.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관계를 이용한다. 와타나베와는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에 대해 많은 말을 나누지만, 삶의 방식은 전혀 다르다. 그는 결국 자신이 원하던 길을 손에 넣는다. 대신 그를 사랑했던 하츠미는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고 사라진다. 조용하고 착했던 그녀의 죽음은, 이 소설이 말하는 또 하나의 상실이다.
이 이야기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보다 ‘그 일이 사람을 어떻게 바꾸었는가’를 묻는다. 등장인물 누구 하나 정상적인 삶을 산다고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소설은 오히려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정상이라고 부르는 삶은 과연 무엇인가. 내가 이 책을 지난 이십 년 동안 잊을 만하면 다시 펼쳐 들었던 이유도, 어쩌면 이 질문이 여전히 나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2003년 5월의 맑은 날, 대학생이었던 나는 봄이 주는 설렘과 안온함 속에 있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늘 불안했다. 겉으로는 평온했지만, 쉽게 지워지지 않는 상실감이 늘 따라다녔다. 젊고 밝은 얼굴로 웃는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어딘가 잘못된 세계에 서 있는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이유 없이 가라앉고, 특별한 사건 없이도 불안한 날들이 반복되었다.
그때 처음 만난 『상실의 시대』 속 인물들은 낯설지 않았다. 그들은 유난히 불행해서 빛바랜 존재가 아니라, 나와 비슷한 정서를 품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읽으며 알게 됐다. 나만 이 세상에서 상실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외로움은 제거해야 할 결함이 아니라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안고 가는 고독에 가깝다는 사실을. 나의 불완전함이라고 믿어 왔던 감정들이, 어쩌면 세상을 조금 더 예민하게 바라보게 만드는 감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됐다.
그래서였을까. 내가 부족한 사람처럼 느껴질 때마다 나는 이 책을 다시 펼쳐 들었다. 위로를 바라면서라기보다, 이 감정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이제는 이 오래된 친구 같은 책을, 주변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게 소개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돌아오는 12월 독서모임의 책으로 이 작품을 골랐다.
나는 그 공기 덩어리를 내 속에 느끼면서 열여덟 살 봄을 보냈다. 그렇지만 동시에 심각해지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았다. 심각해진다고 반드시 진실에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 생각하든 죽음이란 심각한 하나의 사실이었다. 그런 숨 막히는 배반 속에서 나는 끝도 없이 제자리를 맴돌았다. 지금 돌이켜 보면 참으로 기묘한 나날이었다. 삶의 한가운데에서 모든 것이 죽음을 중심으로 회전했다. p56
학창 시절, 친구들이 나를 부르던 별명은 ‘진지교수’였다. 모두가 가볍게 웃고 떠들 때, 나는 가끔 마음이 무거웠다. 눈앞에 보이는 세계보다, 그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본질이 먼저 떠올랐다. 우리는 왜 태어났고, 어디로 가는가. 그 질문은 결국 죽음과 맞닿아 있었다. 시간이 흘러 삶의 이면에 있는 죽음이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되었을 때, 심각해진다고 해서 반드시 진실에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때로는 힘을 빼고 바라볼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는 것도.
“이들의 진정한 적은 국가 권력이 아니라 상상력의 결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p122
이 문장은 당시 일본 학생운동 세력을 향한 냉소에 가깝다. 강의실에 예고 없이 들어와 격문을 뿌리고, 거대한 구호를 외치던 학생들의 모습은 혁명에 가까웠다기보다 연출된 장면처럼 느껴졌다. 문제는 분노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분노가 삶의 구체적인 결로 내려오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이념은 거대했지만, 정작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대한 상상력은 비어 있는 듯했다.
나는 모든 학생운동이나 변혁의 시도를 비웃고 싶은 생각은 없다. 노동자의 권리, 노동조합의 필요성에도 기본적으로 공감한다. 다만 현장에서 보았던 많은 장면들은 늘 같은 패턴을 반복했다. 누군가는 언제나 적이었고, 누군가는 반드시 전선 너머에 있어야 했다. 특히 임단협을 포함한 노사 관계에서 상대를 무조건 ‘투쟁의 대상’으로만 규정하는 오래된 태도는, 나에게는 가장 상상력이 결여된 장면으로 남아 있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불완전한 인간이거든” p183
요양 시설에 있는 나오코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와타나베는 환자와 의료진이 서로 어울리는 장면을 바라보며 인간으로서 완전한 존재는 없다는 판단에 이르게 된다. 환자를 돌보는 의사마저도 결국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게 되는 부족함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느낀다.
내가 살면서 가장 성숙했다고 느꼈던 순간도 바로 이 깨달음과 닿아 있다. 나의 불완전함이 위대한 예술가나 성인이라 불리는 존재들에게도 예외 없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을 때였다. 결국 인간은 모두 불완전한 존재이며, 그런 모습을 인정하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 애쓰는 과정이 삶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더 이상 고독을 외로움으로 느끼지 않게 되었다.
“그녀가 내뿜는 힘은 아주 사소했으나, 그것이 상대의 마음에 진동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P414
책에서 어떤 문장이 유독 마음에 멈추는 이유는 단순하다. 비슷한 상황이나 감정을 이미 겪어봤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문장을 만나면 형광펜으로 줄을 긋는다. 이 문장은 정확히 그런 문장에 속한다.
동시에 조심스럽다. 여기서 말하는 ‘그녀’의 감정을 아내에게서 떠올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내는 결코 사소한 힘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아내가 내뿜는 힘은 아주 강력하다. 그래서 그녀를 만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 매력 앞에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내가 이 문장에 오래 붙들린 이유가 있다. 지나온 삶 속에서, 내 마음에 분명한 흔적을 남긴 어떤 ‘그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존재가 내뿜는 힘이 아주 사소하고 조심스러웠지만, 이상하게도 내 마음에는 깊은 진동을 남긴 사람이었다.
나는 아내만큼이나 분명한 존재감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 유형의 ‘그녀‘들은 대체로 나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나와 비슷한 결의 사람을 만나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살고 있다. 그럼에도 『상실의 시대』처럼 지나간 감정을 불러내는 소설을 만날 때면, 어느 순간 문득 그 아련한 기억이 떠오르기도 한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그것도 소중한 상대의 마음에 모르는 새 상처를 주었다니, 정말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다.” p473
“와타나베의 아픔은 미도리하고 아무 관계도 없잖아. 그 사람한테 더 상처를 주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 거야. 그러니 괴롭겠지만 더 강해져. 더 성장해서 어른이 되는 거야.“ p557
이 문장에서 나는 아버지를 떠올렸다. 이십 대 중반, 서로 인연을 끊고 얼마 전 그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끝내 찾아가지 않았다. 내 기억 속 아버지는 어린 시절의 짧은 장면들로만 남아 있다. 그는 자신의 아픔을 가족에게 고스란히 전가했고, 그 과정에서 그의 아내와 자식은 각자의 방식으로 상처를 짊어져야만 했다. 그 영향에서 나 역시 한동안 자유로울 수 없었다.
결혼 초기의 나는 아내에게 주는 상처를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나의 아픔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든, 그것이 그녀에게 상처가 된다면 견디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었다. 그것은 “나도 아팠으니 너도 참아라”라는 아버지의 방식과 다르지 않았다.
어느 날, 나의 그런 모습에 겁에 질린 아내가 눈물을 흘렸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평생 거부해 왔다고 믿었던 아버지의 모습을 그대로 흉내 내고 있다는 것을. 나의 아픔은 아내와 아무 관계가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마음에, 그것도 가장 소중한 사람의 마음에, 당연하다는 듯이 새 상처를 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은 정말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그 깨달음 앞에서 도망치지 않는 것이, 비로소 강해지는 일이었다. 도망치지 않고 견디는 것이 성장하는 일이었고, 어른이 되는 일이라는 것을 그때 다짐하게 되었다.
“주위가 어두우면 잠시 멈춰 서서 어둠이 눈에 익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거에요.“ p501
“잠깐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아니요. 지금 급한 일이 있어 시간을 낼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만 이야기할게요. 지금처럼 말도 빠르고 급하게 살면 인생에서 놓치는 게 많을 수 있습니다. 명심하세요.”
“……”
학창 시절, 나는 길거리에서 이른바 ‘도를 아십니까’라는 말로 자주 붙잡혔다. 어느 날, 바쁘다며 길을 돌아서는데 비슷한 또래로 보이던 여성이 내게 이런 말을 던졌다. 순간 어이가 없어 뒤를 돌아봤지만, 그녀는 이미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자기 갈 길을 가고 있었다.
그 장면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녀의 말이 정확히 나의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급했다. 말이 생각보다 빨라 말끝을 더듬기 일쑤였고, 친구들은 그런 나를 두고 ‘언어장애’라고 놀리기도 했다. 급한 성격은 말투뿐 아니라 행동 방식에서도 드러났다. 무엇이든 시작할 때 충분히 준비하기보다 일단 움직이고 보는 쪽이었다. 그러다 보니 해야 할 것들이 뻔히 보이면서도, 꼼꼼하게 마무리하지 못해 몇 번이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일들이 반복되었다. 나는 그런 내 모습이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랜 시행착오 끝에, 오늘의 나는 마음의 속도를 예전의 반쯤으로 낮춰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특히 꼼꼼하지 않으면 놓칠 수밖에 없는 독서를 통해 나를 훈련하게 된 순간부터,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잠시 멈춰 서서 순서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마음에 새기며 살아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독서도 글쓰기도, 그리고 취미인 마라톤 역시 모두 내 속도를 의도적으로 늦추는 연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주위가 어두우면, 잠시 멈춰 서서 어둠이 눈에 익기를 기다리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