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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에서 나로 산다는 것

by 세템브리니


서론: “당신은 당신 자신으로 살고 있습니까.”


과거에 다녔던 회사의 임직원 설문조사에는 이런 문항이 있었다. 직원 만족도를 측정하는 방식은 어느 회사나 비슷했지만, 이 질문은 조금 낯설었다. 조직의 가치에 얼마나 공감하는지, 상사와의 관계는 어떤지, 일의 성취감은 어떤지 같은 문항들 사이에서 “나 자신으로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뜻밖이었다.


그 문장은 물으나 마나 한 질문처럼 보였다. 회사가 제시하는 기준과 나라는 사람이 반드시 일치할 필요는 없지만, 조직 안에서는 그 간극을 쉽게 드러낼 수도 없다. 나 자신으로 사는 일이 회사가 요구하는 모습과 어긋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회사가 원하는 인재상과 개인이 느끼는 정체성이 다를 때 나는 나 자신으로 살아도 되는가. 조직은 모두 다른 개인을 그대로 인정해도 되는가.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게 될지 궁금했다.


직장 생활을 15년 정도 하며 늘 경계해 온 부분이 있다. 나라는 존재를 조직이 원하는 구성원상에 100% 맞추려는 태도다. 요즘 세상에서 말을 듣지 않으면 회사 안에서 자리를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조직이 바라는 모습에 모든 생각과 감정을 맞추는 순간, 나는 내 삶의 의미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나의 정체성이 조직의 필요에 따라 규격화된다면, 나라는 존재는 무엇으로 남는가.


실제로 그런 사례는 적지 않았다. 평가나 연봉으로 자신을 규정하는 사람들. 오랫동안 조직에 기여해 왔다는 자부심으로 살아왔지만 갑작스러운 변화 앞에서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게 된 이들. 조직의 방향이 바뀌자 자신에 대한 확신까지 무너지는 장면을 여러 번 보았다. 이런 경험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묻게 된다. 나의 정체성은 회사가 부여하는 역할과 평가로 설명되는 것인가. 아니면 조직 속에서도 독립된 좌표를 가져야 하는가.


사람은 특정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도구가 아니다. 스마트폰처럼 기능적 목표가 정해진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어떤 환경에서도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피할 수 없다. 조직은 이 질문을 가장 자주, 그리고 가장 강하게 만들어내는 공간이다. 나는 짧지 않은 직장 생활 동안 이 질문 앞에서 여러 번 멈춰 서야 했다. 정체성은 조직이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 관계 속에서 스스로 구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본론 1: 존재에서 기능으로 - 조직의 언어로 본 ‘정체성’


조직에서 정체성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내가 HR 분야에서 일하며 가까이서 본 것은, 조직이 사람을 평가하고 구분하고 배치하는 과정 자체가 구성원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구조라는 점이다. 사람은 스스로를 결정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조직이 만들어놓은 언어와 기준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조정하며 살아간다. 조직은 개인의 정체성을 기술적으로 구성하는 환경이다.


조직에서는 가장 먼저 직무와 역할이 정체성을 규정한다. 분업화된 사회에서 구성원은 각자의 영역을 갖게 된다. “나는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은 조직에서 매우 현실적이며, 그 답은 곧 정체성의 초석이 된다. 특정 직무를 맡는 순간 사람은 그 기능의 언어를 배우고 그 역할의 태도를 익힌다. 역할은 단순한 업무가 아니라 정체성의 틀이다. 조직은 이 틀을 통해 사람을 구분하고, 사람은 그 틀을 통해 스스로를 인식한다.


직급과 평가, 보상은 정체성을 또 다른 방식으로 고정한다. 관료제적 구조에서 직급은 위계가 아니라 사회적 정체성의 구획이 된다. “실무자”, “책임자”, “관리자” 같은 호칭은 단순한 직급 표시가 아니라 개인이 자신을 설명하는 언어가 된다. 평가나 연봉 역시 숫자로 표현된 결과처럼 보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숫자에 자신의 가치를 투사한다. 조직은 사람을 체계적으로 배열하려 하고, 사람은 그 배열 속에서 자신을 위치시킨다.


조직의 방향과 기대 또한 정체성을 결정한다. 기업은 목표를 세우고, 지표를 설정하며, 구성원에게 성과를 요구한다. 이런 흐름 속에서 조직이 선호하는 정체성이 만들어진다. 목표에 충실하고, 속도에 민감하고, 조직의 철학을 맞추는 태도는 ‘이상적 구성원’의 이미지가 된다. 반대로 그 리듬에 어긋나는 사람은 스스로를 문제적인 존재로 인식하기 쉽다. 정체성은 이렇게 조직이 원하는 패턴을 내면화하는 과정에서 더욱 단단해지거나 흔들린다.


조직의 정체성과 개인의 정체성이 충돌하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은 감정의 균열이다. 사람이 조직의 방향에 동의하지 못할 때, 성과가 떨어지거나 의욕이 사라지는 현상이 뒤따른다. 어떤 경우에는 조직 안에서의 존재감을 잃고 자신에게 더 맞는 공간을 찾아 이동하려 한다. 정체성의 충돌은 단순한 불만이 아니라 존재의 방향이 맞지 않는다는 신호다. 조직 역시 구성원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조직의 가치와 조화시키길 바란다. 그래야 흐름이 부드럽고 저항이 줄어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조직에서의 정체성은 개인의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솟아오르는 것이 아니다. 역할, 직급, 지표, 기대 같은 요소들이 사람을 감싸고 그 안에서 정체성은 서서히 형성된다. 정체성은 단순한 자기 인식이 아니라 조직이라는 구조가 만들어내는 결과다.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조직으로부터 일정 부분 빌려오고, 그 빌려온 모습을 통해 다시 자신을 설명한다.


본론 2: 기능에서 존재로 – 인문학으로 본 ‘정체성’의 재해석


1. 하이데거: '도구적 존재'의 위험과 '본래적 자기'의 요청


우리가 직장 생활에서 마주하는 정체성의 위기는 결국 인간을 기능으로만 이해하려는 조직 구조의 한계와 맞닿아 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직무, 직급, 평가 지표는 개인을 기술적으로 규격화한다. 인문학은 이러한 규격화가 인간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도구화'의 위험을 내포한다고 지적한다.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세계 속의 모든 사물을 '도구'(Zeug)와 '현존재'(Dasein)로 구분했다. 도구는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존재이며, 그 가치는 기능에 의해 결정된다. 이와 달리 현존재는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에 대해 스스로 물음을 던지는 유일한 존재'를 의미한다. 조직의 관점에서 구성원이란 특정 목적을 위해 배치된 도구처럼 다뤄지기 쉽다.


내가 어떤 직무를 맡았고, 어떤 직급을 가졌으며, 연봉이 얼마라는 사실은 나를 조직이라는 시스템 안에서 '무엇을 하는 존재'로 고정한다. 이 순간, 나는 조직의 성과 창출이라는 거대한 목표 앞에서 대체 가능하고, 기능이 쇠퇴하면 교체될 수 있는 도구처럼 전락할 위험에 놓인다. 하이데거는 사람들이 이처럼 외부의 기준과 사회적 기대, 즉 '익명적인 그들'(Das Man)의 규범 속에 묻혀 스스로를 정의할 때를'비본래적 자기'(Uneigentlichkeit)의 상태라고 보았다. 평가나 연봉에 자신의 가치 전체를 투사하는 행위는 조직이 제시한 기준에 나의 존재를 끼워 맞추는, 가장 흔하고 위험한 비본래적 태도이다.


이 비본래적인 정체성의 틀을 깨고 나오는 것이 곧 '나 자신으로 사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요청한 '본래적 자기'(Eigentlichkeit)의 획득은 조직의 기준이나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오직 나 자신의 실존적 선택과 책임에 기반하여 스스로를 정의하는 '결단'(Entschlossenheit)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나의 정체성은 조직이 부여하는 본질이 아니라, 조직이라는 환경 속에서도 스스로를 주체적으로 기획하고 만들어가는 실존적 프로젝트이다. 조직을 떠났을 때 사라지는 정체성이 아니라, 어떤 조직에 속하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세우는 것이 이 결단의 핵심이다.


2. 레비나스: '타자'의 얼굴과 정체성의 윤리적 좌표


정체성은 나 자신에 대한 성찰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조직은 역할과 기능을 중심으로 구성되지만, 동시에 다양한 타자들이 밀집한 공간이다. 하이데거가 존재의 주체성을 회복시키는 데 집중했다면, 레비나스는 정체성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윤리적으로 구성된다고 보았다. 정체성은 내면에 갇혀 있는 폐쇄된 구조가 아니라, 나와 타인이 마주치는 그 순간에 비로소 드러나는 개방된 구조다.


조직은 구성원을 역할과 직급이라는 개념으로 분류하고 관리하려 한다. 그러나 레비나스에게 '타자의 얼굴'(Visage)은 이러한 모든 개념이나 기능으로 환원될 수 없는, 고유하고 절대적인 존재 그 자체이다. 타인의 얼굴을 직면하는 순간, 나는 그를 조직의 '인력'이나 '자원' 또는 '평가 대상'으로 대하는 태도를 멈추라는 윤리적 명령을 받는다. 이는 곧 조직이 부여한 나의 역할을 수행하기에 앞서, 동료나 부하 직원, 고객을 도구가 아닌 존엄한 존재로 인정하고 그들에게 무한히 응답할 윤리적 책임이 나에게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조직 안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주체적이고 흔들리지 않는 답은, 나의 직무 능력(기능)이나 성과(지표)가 아니라, 타인의 고통과 요구에 대해 내가 어떻게 책임지고 응답하는 존재인가에 달려 있다. 나의 정체성은 조직의 목표에 얼마나 충실했는지보다, 조직 시스템 속에서도 타인을 도구화하지 않고 인간 대 인간으로 대하며 윤리적으로 행동했는지에 따라 완성된다.


그러므로 조직 속에서 '독립된 정체성의 좌표'를 가진다는 것은, 내가 조직의 평가와 기대가 아닌 나 자신의 윤리적 선택과 책임에 기반한 실존적 주체로 서는 것을 의미한다. 정체성은 조직이 정해주는 구획이 아니라, 하이데거적 ‘결단’과 레비나스적 ‘책임’을 통해 스스로 구성하고 완성해나가는 삶의 윤리적 궤적이다. 이것이야말로 조직의 기능적 요구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본론 3: 개인의 체험 - 실천적인 정체성의 구축


1. 위기의 순간: '비본래적 자기'의 직면과 '불안'의 신호


직전에 다녔던 직장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 유망 사업을 묶어 탄생한 회사였다. 모두가 아는 그 대기업의 이름은 곧 안정성과 명예의 상징이었기에, 직원들의 기대는 높았다. 그러나 이 회사의 설립 목적은 그룹의 경영난을 극복하기 위해 핵심 사업을 묶어 사모펀드에 매각하기 위함이었다. 결국 직원들에게 갑작스러운 매각 통보가 내려왔다. 미래 산업의 주역으로 선발되었던 직원들은 하루아침에 모회사의 후광이 사라지고 전혀 다른 정체성의 조직에 소속되는 격변을 맞이하게 되었다.


A 팀장은 그 변화의 중심에 서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해당 대기업에 신입 공채로 입사해 15년 넘게 회사에서 요구하는 업무와 역할을 곧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고 살아왔다. 한 회사에서 시키는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며 팀장이라는 직위에 오른 지금까지를 커다란 자부심으로 여겼다. 국내 대기업의 순환보직 시스템에 따라 전문성을 한 분야에 깊게 쌓기 어려웠지만, 조직에 대한 충성과 헌신이야말로 자신의 가치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회사의 결정은 그의 모든 것을 흔들었다. 소속감은 급속도로 옅어졌고, 더는 기존 그룹사가 아니라는 사실은 그를 지금까지 이끌어 온 동기부여를 망가뜨렸다.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혀 새로운 조직의 요구에 적응하지 못하자, 업무 능률은 떨어졌고 동료들과의 마찰도 잦아졌다. 결국 그는 직장인이 된 후 처음으로 경험하는 정체성의 불안을 고스란히 겪게 되었다.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지방에서도 근무하고 업무도 수시로 바꿨는데 지금 나에게 남은 것은 불안정한 미래뿐이네." 매각 후 입사한 나에게 털어놓던 그의 하소연은 그가 조직에게 정체성을 '빌려온 대가'를 치르고 있음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나는 이러한 A 팀장의 상황이 조직의 평가나 역할에 모든 것을 걸었을 때 맞닥뜨리는 비본래적 자기의 한계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판단했다. 나의 직함과 역할이 사라지는 순간, '나는 누구인지' 설명할 수 없는 깊은 공허함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깊은 불안과 공허함은 좌절로만 해석되지 않는다. 하이데거가 말했듯, 이 실존적 '불안'은 바로 개인이 익명의 세계에서 벗어나 본래적인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야 한다는 가장 강력한 실존적 신호이기도 하다. A 팀장이 겪는 이 고통스러운 불안이, 조직이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닌 스스로 주체적으로 정체성을 찾아야 할 때가 왔음을 알리는 격렬한 '결단'의 요청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2. 결단을 통한 주체성 회복과 '타자'에 대한 윤리적 책임


조직의 규격화된 정체성에서 벗어나 주체성을 회복하는 과정은 결국 윤리적 결단을 요구한다. 이전 직장에서 사업부 인사 담당자로 일할 때, 나는 이 문제와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영업을 지원하는 직원 몇 명이 파견사를 바꿔가며 수년 동안 비정규직 계약을 이어오고 있는 노동법 위반 정황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원래 정규직이었으나, 회사가 인건비 사정을 이유로 개인들의 동의를 얻어 근로 계약만 외부로 바꾸는 뒤틀린 상황이었다. 회사로부터 '고용은 유지시켜 줄 테니 계약 형태만 바꿔 달라'는 약속을 믿고 수년째 불안정한 신분으로 일하고 있던 것이다.


나는 이 현상을 방치할 수 없었다. 인건비 삭감으로 인한 이윤 추구가 기업의 생리라고 해도 노동법 준수는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무엇보다 이들이 조직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 내쳐질 수 있는 도구처럼 취급당하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이는 레비나스가 경고한, 타자를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윤리적 폭력이었다. 한국 노동법에 미숙했던 외국인 상사는 당사자들의 반발이 없으니 “내년에 예산을 받고 다시 생각하자"라고 제안했지만,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타인의 고유한 존재를 조직의 비용 효율이라는 기능적 잣대로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문제가 되지 않을 상황에서, 회사를 대리하는 사측의 입장이 아닌 인간 대 인간의 윤리를 주장하는 것은 명백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법 위반의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았기에 나를 공개적으로 막지 못했다. 나는 여러 층의 경영진을 설득하는 어려운 과정을 거쳤고, 결국 3개월 만에 그들을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시킬 수 있었다.


이 경험을 되돌아보면, 이는 조직의 기능적 요구(인건비 절감)와 나의 윤리적 가치 사이의 간극을 인정하고, 조직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가치와 역할을 고수했던 결단의 사례이다. 이는 직무를 수행하는 단순한 역할을 넘어,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고 정의를 실현하려는 소명을 발견하고 실천하는 과정이었다. 이처럼 타인에 대한 레비나스적 윤리적 책임을 하이데거적 결단을 통해 실현했을 때, 나는 조직이 부여하는 직함보다 훨씬 단단하고 만족스러운 나만의 정체성을 구축할 수 있었다.


결론: 기능과 존재의 조화, 독립된 좌표를 찾아서


조직에서 나의 정체성을 지키고 사는 것은 과연 가능할까? 이는 결국 서론에서 던졌던 "당신은 당신 자신으로 살고 있습니까?"를 묻는 다른 방식의 질문이다. 내가 다녔던 회사에서 이런 질문을 조직문화 설문에 남긴 것은, 단순한 만족도 측정을 넘어 실존적 결단과 윤리적 책임을 구성원들에게 환기시키려는 고도화된 의도였을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기업 환경에서 정체성은 직무나 평가와 같은 조직의 기술적 구조에 의해 규격화된다. 하지만 우리는 본론 2와 3을 통해 인간이 그 규격을 넘어 주체적인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실존적 존재임을 확인했다. 하이데거가 주창한 개인의 주체적 결단을 통해, 그리고 레비나스가 강조한 타인을 향한 윤리적 책임을 통해, 우리는 궁극적으로 조직이라는 환경 속에서도 본래적 자기를 찾을 수 있다.


현실적인 상황에서 이러한 인문학적 개념을 적용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은, 조직이 정해준 정체성에서 벗어나며'불안'을 통해 실존적 고민을 시작한 이가 있었고, 직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도 본래의 소명을 지키며 윤리적 책임을 다하는 행위를 이끌어낸 사례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철학적 논의가 현실의 구체적인 삶의 궤적으로 연결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따라서 조직에서의 정체성을 '순응'하거나 '벗어남'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버려야 한다. 진정한 정체성은 조직이 요구하는 기능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서도, 그 역할을 주체적이고 윤리적인 개인의 존재 방식으로 승화시킬 때 완성된다. 다시 말해, 조직 안에서 기능은 생존의 도구이지만, 존재는 삶의 의미와 윤리적 좌표이다. 정체성은 이 둘을 끊임없이 조화시키려 노력하는 실천적인 과정 그 자체이다.


조직 속에서 독립된 좌표를 갖는다는 것은 외톨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조직의 가치와 타인의 존재를 존중하면서도 나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조직에 종속시키지 않는 단단한 내면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당신의 정체성은 조직이 빌려준 역할인가, 아니면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삶의 궤적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끊임없이 찾고, 매 순간 결단하며 타인에게 윤리적으로 응답하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장 바람직하고 본래적인 직장인의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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