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우마제인 제4회 시대정신포럼 “카를로 로벨리의 관계론적 자연철학” 참석 후기)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일까? 사람은 정말 변하지 않을까? 함께하기 괴로운 존재를 가족으로 만났거나, 매일 마주해야 하는 사람이 지속적으로 실망을 안겨준다면, 이런 질문을 한 번쯤 마음속에 품어봤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괴로움을 안겨주는 존재들이 주변에 적지 않았고, 그 덕분에 존재란 과연 고정된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는 삶을 살아왔다.
답은 의외의 곳에서 찾아왔다. 바로 양자역학이었다. 물론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이론이기에, 내가 고민해 온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런 고민을 오래 이어온 나에게는 가슴이 시원하게 뚫리는, 꽤 설득력 있는 주장처럼 다가왔다. SF 소설을 깊이 이해해 보고자 시작했던 나의 양자 공부는, 그렇게 존재에 대한 질문이라는 동력을 얻어 점점 더 멀리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양자이론은 세상을 아주 다르게 바라본다. 우리가 익숙한 세계는 눈에 보이는 사물들이 뚜렷한 경계를 가지고 존재하는 세계다. 사과는 사과이고, 돌은 돌이다. 하지만 양자의 세계에서는 그 경계가 흐려진다. 입자는 한 곳에만 있지 않고, 여러 가능성으로 퍼져 있다가 누군가 그것을 ‘본다’는 순간 하나의 모습으로 결정된다. 즉, 존재는 스스로 완성된 실체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가능성이다.
이 관점으로 세상을 다시 보면 ‘변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도 조금은 다르게 들린다. 누군가의 모습은 그 사람 안에 고정된 성질이 아니라, 우리와 맺는 관계의 방식에 따라 달라지는 현상일지도 모른다. 나를 괴롭혔던 누군가의 단단한 성격도, 다른 관계 속에서는 전혀 다른 결로 드러날 수 있다. 나 또한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 세상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관계의 움직임 속에 있다는 양자이론의 관점은, 그렇게 내게 무겁게 머무는 하나의 사유가 되었다.
어제는 “인문정신과 철학문화의 창달”을 표방하는 인문철학재단 타우마제인(Thaumazein) 이 주최한 시대정신 포럼 〈카를로 로벨리의 관계론적 자연철학〉에 다녀왔다. 고대 그리스어로 ‘경이로움’을 뜻하는 타우마제인은, 몇 년 전 HRD 세미나에서 주최 측이 준비 중이던 프로젝트로 처음 알게 된 곳이었다. 인문철학의 대중화를 목표로 한다는 점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때 나는, 이 프로젝트가 실제로 실행된다면 꼭 어떤 방식으로든 참여하고 싶다고 마음먹었었다.
카를로 로벨리는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로 처음 알게 된 이탈리아 출신의 물리학자다. 그는 양자이론을 시공간에 적용해 세계를 새롭게 설명하려 한 인물로, 한동안 내 관심을 붙잡아 두었다. 책을 읽은 지 오래되어 기억이 희미했기에, 포럼에 참석하기 전 올해 6월에 출간된 신작 『무엇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를 다시 읽고 갔다.
포럼에는 발표자와 패널 교수 8명, 관계자를 제외하면 청중이 나를 포함해 세 명뿐이었다. 평일 오후 5시, 그것도 자연철학을 주제로 한 강연이라면 대중 강연이라기보다 학문적인 세미나에 가까운 자리였다. 사회과학 전공에 물리학은 독서로만 공부해 온 나로서는 잠시 망설여졌지만, 결과적으로 태어나서 들은 강의 중 가장 흥미로운 두 시간을 보냈다.
발표자는 서울시립대 철학과 이중원 교수였다. 그는 로벨리의 저서를 직접 번역하고 감수한 국내 대표 연구자였다. 강연은 〈카를로 로벨리의 관계론적 자연철학〉이라는 제목 아래, 로벨리의 문제의식과 자연철학적 직관, 수학적 접근, 상대성이론과 양자이론의 존재론적 함축, 루프양자중력이론, 그리고 불교의 ‘공(空)’ 사상과의 연결까지 촘촘히 이어졌다.
이중원 교수의 발표에 따르면, 로벨리는 과학자이면서 동시에 철학자, 그리고 시인에 가까운 사유가를 닮아 있다. 그는 물리학의 최전선에서 연구를 이어가면서도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놓지 않는다. 그의 물리학은 단순한 자연 설명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를 근본에서 바꾸려는 철학적 사유에 가깝다. 로벨리는 “세계는 사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책상이나 나무, 혹은 사람을 본다는 것은 고정된 실체를 인식하는 일이 아니라, 빛과 공기, 신경 신호가 얽혀 만들어낸 관계의 결과다. 세계는 단단한 고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흔들리고 반응하는 관계의 그물망이며, 우리가 ‘존재’라 부르는 것은 그 관계 속에서 잠시 드러나는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
로벨리의 이름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루프양자중력이론’이다. 이 이론은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이론을 결합하려는 시도에서 탄생했다. 일반상대성이론은 시공간이 부드럽고 연속적인 곡면이라고 설명하지만, 양자이론은 세계가 불연속적인 알갱이의 점프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이 두 세계관은 서로 맞물리지 않는다. 로벨리는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 공간과 시간 자체를 양자화했다. 즉, 시공간이 더 이상 부드러운 천처럼 이어진 것이 아니라, 미세한 알갱이들—‘공간의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바닥,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 그리고 별빛이 지나가는 우주까지 모두 루프(loop), 즉 고리 모양의 네트워크로 연결된 그물망이다. 공간은 그물의 틈이며, 시간은 그 그물의 진동이다. 이렇게 보면 세상은 연속된 무대가 아니라, 끊어졌다 이어지며 진동하는 관계의 장이다.
로벨리가 말하는 세계에서는 시간도 더 이상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 그는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The Order of Time)』에서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단언한다. 우리가 느끼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순서는 우주의 본질이 아니라 인간의 경험이 만들어낸 질서일 뿐이다. 아주 미세한 차원에서는 사건들이 어떤 순서로 일어나는지조차 정해져 있지 않다. 사건들이 서로 관계를 맺으며 변화하는 그 과정 자체가 세계이며, 우리는 그 일부를 ‘시간의 흐름’으로 느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미래”라고 부르는 것은 어디에 있을까? 로벨리는 말한다. 미래는 이미 우주 전체의 구조 속에 포함되어 있지만, 아직 우리와 관계를 맺지 않은 사건들의 영역이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지만, 아직 드러나지 않은 가능성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의 방향성—즉 ‘앞으로 간다’는 느낌—은 단지 정보와 기억이 쌓여가는 방향, 다시 말해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을 인간이 인식하는 방식일 뿐이다.
로벨리의 이러한 사유는 물리학을 넘어서 철학과도 닿아 있다. 그는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Reality Is Not What It Seems)』에서 세계를 “관계의 장(場)”으로 묘사한다. 세계는 사물을 담는 상자 같은 공간이 아니라, 사물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구성하는 관계의 구조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속에서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파동일 뿐이며, 모든 존재는 서로를 통해 의미를 가진다. 이 생각은 동양철학의 상호의존 개념이나, 고대 그리스 철학의 ‘아페이론(무한한 근원)’과도 닮아 있다. 세계는 완성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되는 과정이며, 우리는 그 과정 속의 작은 흔들림이다.
내가 특별히 관심을 가진 부분은 물리학을 단순한 자연 설명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재해석으로 본 로벨리의 관점이다. 그에게서 우주는 단단한 구조물이 아니라, 끝없이 얽히고 변화하는 과정이며, 그 속에서 공간과 시간, 물질과 의식, 과거와 미래의 경계는 모두 흔들린다. 우리는 고정된 세계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잠시 반짝이는 사건으로 존재한다. 그 사실을 이해할 때, 비로소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라는 말의 진짜 의미―우리가 세계의 일부로서 함께 진동하고 있다는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어제 발표에서도 잠시 언급됐지만, 그런 측면에서 나는 불교의 연기(緣起) 사상과 나아가 용수(龍樹)의 공(空) 개념에 깊이 공감한다. 연기란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은 서로의 인연과 관계 속에서 생겨나고 사라진다는 뜻이다. 이 사상은 곧 고정된 자아나 본질은 없다는 무아(無我)의 관념으로 이어진다. 용수는 연기 사상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켜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은 연기에 의해 생긴 것이므로, 그 자체로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공(空)이다.”
여기서 ‘공’은 허무를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것이 관계 속에서만 성립한다는 긍정의 철학이다. 요약하자면, 연기는 “모든 것은 서로 의존해 생겨난다"라는 통찰이며, 공은 “그 의존 관계 속에서 고정된 실체는 없다"라는 깨달음이다.
오늘 이 자리에 온 이유를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이런 관심사를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이런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로벨리의 책이나 불교의 사상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살면서 실제로 그런 현상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경험을 이론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론적 지식이 부족한 나도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런 나 자신이 조금은 근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발표 이후 이어진 패널 토의에서도 인상적인 논의들이 있었다. 다소 철학적인 접근이었지만, 어떤 존재든 관계를 통해 의미를 얻고 특별해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였다. 강아지가 반려견으로 격상된 이유도 결국 인간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고, 인공지능이 점점 더 중요한 존재가 되는 이유 역시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그 의미와 위상이 확장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었다. 실제로 그렇다. 나 역시 관계가 맺어지고 지속이 유지되는 순간, 그것이 설령 사물이라 해도 함부로 대하지 않게 되는 경험을 여러 번 했다. 입자 단위의 세계에서 출발한 관계의 이론이, 인간의 삶 속에서도 보이지 않게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 났다.
패널 중에는 행정학을 전공한 교수도 있었다. 같은 사회과학 배경을 지닌 사람으로서, 그가 자연철학의 맥락에서 어떤 질문을 던질지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행정학의 전통적 접근이 사회 현상을 설명할 때 ‘외부의 힘’이나 ‘개별 행위자’에 초점을 두는 한계를 지적했다. 대신 로벨리의 관계론적 세계관, 즉 사물이나 인간, 제도 모두가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관점을 행정학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봤다. 그는 현대 행정의 변화가 ‘자기조직화’나 ‘적응적 거버넌스’, ‘공명적 처리’ 같은 관계 중심의 사고’로 이동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이것이 로벨리의 관계론적 철학과 맞닿아 있다고 했다.
나는 그가 사족처럼 덧붙인 한국 사회에 대한 분석에 깊이 공감했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국가 중심의 선형적 사고에 갇혀 있어,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할 때 하나의 원인만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기후 위기나 부동산 문제처럼 복잡하게 얽힌 사회 현상은 단일한 원인으로 설명될 수 없다. 정 교수는 이런 맥락에서 로벨리의 관계론적 사고, 즉 ‘모든 것은 서로 얽혀 있다’는 관점이 행정학과 정책학에도 새로운 시각을 열어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존재, 양자, 관계, 인간. 평소 나의 세계관을 지배해 온 개념들이지만, 현실 속에서 이런 주제들로 깊이 이야기를 나눌 사람은 좀처럼 없었다. 그래서일까, 이날의 두 시간은 마치 양자 점프라도 한 듯 순식간에 흘러갔다. 강의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아내와 통화하며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흥미로운 강의였다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실제로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많은 인사이트와 영감을 받은 시간이었다.
오늘 나와 관계를 맺은 발표자와 패널의 노교수들을 보며, 나는 자연스럽게 내가 맞이하고 싶은 노년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모두 연로한 나이였지만, 발표와 토론에서 드러난 그들의 총명함과 열정은 놀라웠다. 내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노인과는 달리, 그들은 깊은 주제에 몰입하며 지적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었다. 정확한 언어로 천천히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말하는 모습에서 큰 자극을 받았다. 학자는 아니지만, 나 역시 정신적 가치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과 사유의 힘으로 총명한 노년을 맞이하고 싶다는 다짐이 생겼다. 물질적 가치체계에 일찍 순응해 삶의 요령을 터득한 젊은이들보다, 그들에게서 훨씬 더 순수한 어떤 빛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