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어린 가족, 그럼에도 미래를 향하여
기억을 뒤적여 학창시절을 떠올려보면, 현대사에 대해 제대로 배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시험범위에 속하지 않는 가장 어렵고 복잡한 부분들이라 제외되었던 교과서의 마지막 단원. 단어 하나하나에도 민감히 반응하며 여전히 뉴스에 오르내리는 그야말로 현대의 이야기. 암기식으로라도 이 부분을 자세히 다루었던 것은 오직 수능을 위한 공부에서였다.
교과서에 싣기에, 어떤 사료로서 역할을 하기에는 너무나 근래의 것이라 조심스러울지라도 건너듣는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로, 문학으로, 사회부 뉴스로 현대사의 타래는 생각보다 우리 가까이에 있다. 떠나 살 수 밖에 없던 한 가족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 ‘해방자들’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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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이 할퀸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한 가족의 서사시
나라와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파괴와 치유의 노래
개인의 삶과 나라의 역사는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해방자들]의 이야기는 대부분 미국 캘리포니아를 배경으로 진행되지만, 소설 속 인물들을 얽매고 있는 가장 큰 고통은 자신의 조국이다. 이 이민자들의 역사에서 미국은 조국의 잔혹한 전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도피처로 표상되지 않는다. 국가가 겪은 수십 년간의 점령, 전쟁, 분열은 개인의 삶에도 흉터를 남긴다. 그러므로 [해방자들]은 그저 한 재외국민 가족의 이야기가 아닌, 조국의 역사에 얽매인 우리 자신의 서사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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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일본으로부터 해방을 맞이했지만 온전히 우리의 힘이 아니었기에 더 어지러웠던 한국의 땅. 국가의 존립에서 이제는 이념을 명분으로 지리한 영역 다툼을 하느라 스스로를 옥죄던 사람이 가득했던 때, 요한의 시점으로 이 가족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공산당이라는 의심을 받아 떠나게된 아버지로부터 인숙의 슬픔은 어머니의 부재만큼이나 내면에 크게 자리잡는다. 이후 성호와 결혼했지만 생계를 위해 미국으로 떠나버린 그를 기다리며 시어머니 후란의 시집살이를 묵묵히도 견디는 인숙. 아들 헨리를 품에 안고 마침내 미국에서 가족 상봉을 맞았으나, 그들은 적잖이 삐그덕거린다.
완전한 해방을 맞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을까. 6.25전쟁, 6월민주항쟁, 12.12군사정변 등 한국에서 벌어진 역사의 많은 굴곡만큼이나 이 가족의 미국에서의 삶 또한 부드럽게 흘러가지는 못했다. 가까이에서는 인숙 가족의 삶을 여러 인물의 시점으로 그려내는 듯하지만, 결국 슬픈 역사, 사건이 개인에게 드리운 아픔을 공통적으로 비춘다.
남의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야한다는 소외감,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두려움, 삶 자체를 향한 막연함, 고통을 나누지 못하는 외로움, 세대와 신념의 차이. 현재에도 유효할 인물들의 다양한 슬픔은 역사의 커다란 줄기에서 개인을 향해 깊숙이 뻗어나가며 우리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이 땅의 역사를 생각해보게 한다.
한 때 이웃이었을 우리의 흩어진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들은 한반도의 슬픔의 굴레에서 벗어났을까. 흩어진 것은 이 땅 밖의 이야기이만 한 것일까. 해방자들. 그들은 슬픔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났을까? 답을 알 수 없는 많은 물음을 마주하다보면 요한, 인숙, 성호, 후란, 헨리의 모습에 우리의 삶을 겹쳐보게 된다.
필자와 같이, 한국인 독자들에게는 이민2세로 태어나 살아온 작가의 눈으로 바라본 한인들의 삶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디아스포라를 가로질러 이 땅의 안과 밖에 존재하는 사람들을 엮는 가족, 한국이라는 키워드의 힘은 작품 속에서 강렬하게 느껴진다. 지금껏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가슴 한 구석에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안고 살아갈 이들과 우리가 별반 다르지 않음을, 한 뿌리의 굴곡을 함께하고 있음을 해방자들을 통해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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