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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강민 Dec 11. 2021

정말 저 사람을 사랑으로 보듬어줄 수 있을까

누스바움의 《타인에 대한 연민》을 읽고

 전래 동화 역시 이 구조를 따른다. 음식을 찾아 숲을 헤매는 ‘헨젤과 그레텔’의 문제는 부모가 일을 하면서 아이들을 돌볼 여유가 없는 상황과 굶주림이다. 하지만 동화는 이 현실적인 문제를 숲에 살면서 아이들을 생강 쿠키로 만드는 비현실적인 마녀의 탓으로 돌린다. ‘빨간 모자’는 혼자 먼 거리를 걸어 할머니를 찾아간다. 이야기의 본질은 노화와 돌봄 부족이다. 할머니는 도움이 필요하고 가족은 멀리 산다. 하지만 할머니 집으로 쳐들어온 늑대를 탓하며 구조적 해결책이 필요한 난제에서 관심을 돌린다. 두 전래 동화 모두 악당은 죽고 문제는 해결된다. 우리는 정돈된 세상을 갈망하기 때문에 간단하고 헛된 해결책의 유혹에 쉽게 빠진다. 복잡한 진실을 파고드는 일은 어렵고 개인의 기쁨을 보장하지 않는 세상에서 희망을 품고 사는 것보다 마녀를 불태우는 편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 3장 <두려움이 낳은 괴물, 분노> 中 <분노의 몇 가지 오류들>
 성차별주의는 문제다. 하지만 성차별주의자들의 믿음은 증거로 반박할 수 있다. 실제로도 그랬다. 진짜 문제는 조롱, 혐오 표현, 고용과 선출의 제한, 동등한 인간으로서의 존중 거부 등의 방법을 써서라도 구시대의 질서를 유지하겠다는 남성들의 결심이다. 여성 혐오는 “빌어먹을 여자들이 못 들어오게 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전적으로 부정적이기 때문에 영리한 전략은 아니다. 이는 아이들이 싫다고 외치며 발로 바닥을 치는 것과 비슷하다. 변화를 거부한다고 여성 혐오자들이 해결하고 싶어 하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노동자 계급 남성의 건강 악화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고, 더 많은 사람들이 교육받을 기회를 얻게 되지도 않는다. 그들이 아직 직면하지 못한 문제 역시 해결해주지 못한다. 다시 사랑과 돌봄을 주고받는 방법, 여성들의 경제 활동과 성취가 늘어나고 있는 시대에 새로운 핵가족을 만들어나가는 방법 말이다. 여성 혐오는 순간의 위안일 뿐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한다.
- 6장 <성차별주의와 여성 혐오> 中 <두려움이 만든 모든 감정을 넘어서>
 사랑은 어떤가? 사랑의 형태는 다양하며, 정치적 맞수와 로맨틱한 사랑을, 심지어 우정과 같은 형태의 사랑을 나눌 필요는 없다. (킹은 오해의 소지를 남기지 않기 위해 이를 강조하고 반복했다.) 내가 언급했던 믿음과 비슷한 형태의 사랑은 바로 타인을 온전한 인간으로, 최소한의 선을 행하고 또 변할 수 있는 인간으로 바라보는 시선이다.       
 타인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스토아학파의 냉소적인 절망이 희망적인 삶보다 더 그럴듯해 보일 것이다. 그러므로 희망을 품기 전부터 기본적인 수준의 사랑은 필요하다. 희망은 사랑에 의해 유지되고, 타인에게서 최악보다 최선을 기대하는 영혼의 관대함이 사랑을 지탱한다. 킹이 언급했듯이 행동과 행동하는 사람을 분리하는 일이 이 사랑을 돕는다. 악한 행동을 비난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행동 이상으로 성장과 변화가 가능한 존재다.
- 7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아간다> 中 <두려움 뒤에는 희망이 있다>

 누스바움의 말대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종교에서 보편적으로 이야기하는 이웃 사랑과 같은 사랑은 필수요소다. 심지어 나와 다른 의견, 그것도 나 혹은 남을 해치는 의견을 가진 사람에게마저 사랑을 베풀고 그 사람을 하나의 인간으로 동등하게 대우해줘야 한다. 누군가에게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하기는 쉽지만 실제로 이웃을 그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매우 힘들고 오래 걸리며 성공하더라도 유지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해야만 하는 것이기에, 보복과 시기의 유혹에도 굴복하지 않으며 꾸준히 나아가야 하기에 더 삶이 어려운 듯하다.


 다만, 돌을 던지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수단은 아니어야 하지 않을까. 누스바움이 마틴 루터 킹의 반대 사례로 말하는 말콤 엑스의 말을 조금 빌리자면, 등에 10cm 찔려 있는 칼을 5cm로 밀어낸다고 그걸 진보라고 할 수는 없다. 심지어 칼을 꽂은 자는 칼이 꽂혀 있다는 사실마저 부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사랑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한 번 무너졌을 때 다시 쌓을 수 없다면 사랑 외의 다른 수단도 필요하지 않을까.


 한편, 누스바움은 이웃사랑을 체화하기 위해서는 이웃 공동체와 자주 접촉해야 하고, 이를 위해 대상 공공업무 의무복무제도의 실시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비록, 누스바움의 의무복무가 군 복무는 제외하지만, 군 복무도 과연 민주적 이웃 사랑 실천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일단 지금 내 답은 당연히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낀다. 오히려 인류애를 잃게 만들지 않을까. 공공에의 헌신 경험이 이웃사랑에 기여할지라도, 사회로부터의 고립과 높은 스트레스는 인류애를 갉아먹는다.


 애초에 이웃사랑보다 적 사살에 목적이 있어서 그런 걸까. 역시나 적마저 사랑으로 보듬어줄 수는 없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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