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스프링

by 수수한


지역 안에 큰 도서관이 있고, 여러 작은 도서관들이 곳곳에 있다. 지금은 걸어서 다닐만한 작은 도서관에 주로 다니지만, 십 년도 더 전에는 지역 내에 이 큰 도서관뿐이어서 반납기한에 맞추어 2주에 한 번 이곳에 들르는 것이 나의 일상이었다. 퇴근 후 지하철에서 내려 마을버스로 갈아타면 도서관에 닿는다. 서가를 정처 없이 오가며 책등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배불러졌다. 그때의 나는 미혼이었고 집에 도착하면 엄마가 해주는 따뜻한 밥을 먹으면 되었기에, 느릿느릿 그 시간을 한껏 즐겼다. 2주 뒤에 와서 다시 빌려도 되는데 5권의 선택권은 늘 나를 신중하게 했다.


이제는 그 큰 도서관을 자주 가지 않는다. 주차공간이 협소하여 기껏 갔다가 차 댈 곳이 없으면 매우 곤란하고, 이제는 가족의 수만큼 잔뜩 대출해오는데 버스를 타고 책가방을 잔뜩 나르기에는 시간도, 품도 많이 든다. 나는 그때의 나처럼 한가하게 서가를 오가며 책등을 감상할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많지 않다. 집에 돌아가서 따뜻한 밥을 해야 하는 사람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대신 상호대차 서비스라는 것이 생겼다. 인터넷으로 지역 내 다른 도서관에서 읽고 싶은 책을 선택하면 가까운 도서관까지 배달해주는 서비스이다. 먼 도서관까지 가지 않아도 되고, 서가를 돌아다니며 원하는 책을 일일이 찾는 수고를 덜할 수 있는 것은 장점이지만 때로는 아쉬운 점도 있다.


어제는 버스를 탈 일이 있어 작은 꼬마와 길을 나섰다가 돌아오는 길에 큰 도서관에 다녀왔다. 아이더러 2층의 어린이 도서관에서 책을 보고 있으라고 일러둔 뒤 위층의 어른 도서관에 부리나케 올라갔다. 여행 중에도 도서관을 코스로 넣어 꼭 들리며 여러 지역의 도서관을 자주 다니는 나이지만, 예전에 내가 다니던 동선으로 그 서가를 마주하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지금의 나에게는 아래층에 있는 나의 꼬마가 있으니 마음이 급해지기도 했다. 전에도 그랬듯이 신착코너를 우선 쓱 훑고서 예술란으로 갔다. 아무런 정보 없이 제목만 보고 책을 꺼내고 훑고 다시 꽂기를 반복했다. 요즘도 숱하게 이 도서관의 책을 상호대차 서비스로 만나고 있지만, 어플의 검색으로만은 못 만날 책들이었다. 누구의 추천이 없이는 내 눈에 띄지 않았을 것이고 제목만으로는 빌리지 못할 책들이 수두룩했다. 꺼내고 꼽기를 반복하며 쪼그려 앉아 이 책, 저 책 저울질을 한 뒤 예술 코너에서 3권의 책을 내 몫으로 골랐다.


집에서 다시 읽어보니 데리고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책정보를 보니 2015년이 초판인 책이다. 이 운명적인 만남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나 혼자 자긍심에 뿌듯해한다.


책에서 하라는 대로 ‘그림 그리기는 놀이다.’라는 마음으로 종이를 펴고 펜을 들어본다. 첫 번째 과제는 블라인드 컨투어 드로잉인데 소재를 천천히 관찰하며 소재의 윤곽을 따라 스케치북을 보지 않고, 손을 뗴지 않고 하나의 선으로 그리는 드로잉이라고 한다. 폰으로 내 사진을 보며 스케치북은 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그리고 있는데 작은 꼬마가 외친다.

“우와! 똑같이 그린다.”

나는 순간 설레는 마음에 “정말?”하고 그림을 보았는데 순간 실망감과 함께 푸핫하고 외치고 말았다.

“뭐가 똑같다는 건데?”

“이 책에서 나온 이상한 그림들과 똑같아.”

내가 하는 것이 재미있어 보였는지 어느새 아이들도 내 곁에 종이와 펜을 하나씩 꿰차고 앉아 낄낄대며 그림을 그려댄다. 종이가 아깝다 생각될 정도로, 이게 그림이야 낙서 야할 정도로 휙휙 그려댄다.

“엄마. 이 그림은 못 그릴수록 잘 그리게 되는 것 같아.”

2.jpg 나..........




그렇다고 나도 끄덕이게 되었다. 못생기게 그렸긴 했지만 재미있기도 했다. 처음 펜으로 선을 그을 때는 조심스러워 마치 새 스프링을 온 힘을 다해 누르는 기분이었다. 하나, 둘 그릴수록 마음의 탄성이 줄어들었다고나 할까. 조금씩 적은 힘을 들여 다음 그림을 시작하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자꾸 한다는 것은 마음의 탄성을 줄이는 일이구나.


1.jpg 딸은 화내지도 울지도 않았다. 많이 컸구나.





이쯤 되면 내가 말하는 책과의 운명론 혹은 인연론을 쉽게 무시할 수 없진 않을까? 정말 오래간만에 갔던 그 도서관, 수많은 책꽂이들 중 하필 그 책꽂이,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는데 제목과 표지로 나를 이끌고 휘리릭 넘기는 찰나의 순간에 나를 사로잡아서 우리 집까지 온 인연.

그 인연이 나의 스케치북을 펴게 만들고, 펜 자국을 남기고, 아이들도 그리게 만들고, 내 마음의 탄성까지 시험했으니 책 한 권의 인연이 여타 다른 인연과 비교했을 때 그렇게 가볍게 느껴지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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