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은 기본적으로 남의 일이다
범죄자들에 대한 판결 선고 기사에는 어김없이 형량이 약하다는 댓글이 달린다. 흉악범들에 대한 우리나라 판결의 형량이 약한 감이 있다는 점에 대하여는 동의한다. 그런데 어김없이 나오는 "피해자가 판사의 가족이어도 그런 형량이 나올까?"라는 댓글을 보면 생각이 많아진다. 피해자 가족의 심정에 감정이입하는 분들의 발언으로, 충분히 공감가는 말이기는 하다. 그런데 과연 피해자가 판사의 가족이어도 그런 재판을 할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함무라비 법전의 동해보복(同害報復)의 원칙을 나타내는 유명한 말이다. 즉, 피해를 입은 내용 그대로 가해자를 처벌하라는 의미이다. 물론, 해당 조문들을 자세히 따져보면 계급간 적용에 차별이 있어 엄밀한 의미에서 동해보복의 원칙이 지켜지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섬뜩하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평민이 귀족의 눈을 쳐서 빠지게 하면 그의 눈을 빼고(제196조), 평민이 귀족의 뼈를 부러뜨리면, 그의 뼈를 부러뜨리지만(제197조), 귀족이 평민의 눈을 쳐서 빠지게 하였거나 평민의 뼈를 부러뜨렸으면, 은 1미나를 치르는 것으로 족하다(제198조)}
그런데 동해보복의 원칙은 사실 범죄자에게 매우 유리한 법이라는 해석이 있다. 왜냐하면, 고대 사회에서는 공권력이 비교적 확립되지 못하여 범죄자에 대해 사적 복수가 행해질 우려가 컸기 때문이다. 즉 자식이 누군가에게 맞고 와서 다리가 부러졌다면, 그 부모는 물론이고 전통사회의 특성상 삼촌의 팔촌까지 우루루 몰려가 가해자를 정말 반죽여놓고는 했을 것을 생각하면, 가해자가 자신이 가한 피해, 즉 다리가 부러지는 것 이상으로 처벌을 받아서는 안된다고 하여 가해자를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근대법의 관점에서 보면, 가해자가 과도하게 처벌받는 것을 금지하고, 감정이 앞서서 사적으로 보복하는 것을 금지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의가 있다.
오늘날의 재판도 마찬가지이다. 기본적으로 재판은 공정성을 위해 감정에 치우칠 당사자가 아닌 객관적인 제3자에 의해 행해진다. 만약 재판을 하는 법관이 해당 사건의 피해자 본인 또는 피해자의 친족이거나 하는 등 개인 감정이 재판에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을 경우 우리 법은 원천적으로 해당 법관을 그 재판에서 배제한다. 이를 '제척'이라고 하고, 민사소송도 마찬가지로 제척 제도가 존재한다.
형사소송법
제17조(제척의 원인) 법관은 다음 경우에는 직무집행에서 제척된다.
1. 법관이 피해자인 때
2. 법관이 피고인 또는 피해자의 친족 또는 친족관계가 있었던 자인 때
3. 법관이 피고인 또는 피해자의 법정대리인, 후견감독인인 때
4. 법관이 사건에 관하여 증인, 감정인, 피해자의 대리인으로 된 때
5. 법관이 사건에 관하여 피고인의 대리인, 변호인, 보조인으로 된 때
6. 법관이 사건에 관하여 검사 또는 사법경찰관의 직무를 행한 때
7. 법관이 사건에 관하여 전심재판 또는 그 기초되는 조사, 심리에 관여한 때
8. 법관이 사건에 관하여 피고인의 변호인이거나 피고인ㆍ피해자의 대리인인 법무법인, 법무법인(유한), 법무조합, 법률사무소, 「외국법자문사법」 제2조제9호에 따른 합작법무법인에서 퇴직한 날부터 2년이 지나지 아니한 때
9. 법관이 피고인인 법인ㆍ기관ㆍ단체에서 임원 또는 직원으로 퇴직한 날부터 2년이 지나지 아니한 때
앞에서 "피해자가 판사의 가족이어도 그런 형량이 나올까?"라는 물음에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라고 답하였다. "당연히 그렇다"가 아니라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라고 답한 것은, 판사도 인간인 이상 피해자가 자신의 가족이라면 당연히 가해자에게 평소보다 무거운 형을 선고할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인정한 말이며, 그렇게 재판을 하여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점은 민사소송도 마찬가지이다.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보았던 법정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에서 박차오름 판사(고아라)는 "법대에서 내려다 보기만 하는 판사가 아니라, 사람들의 목소리에 경청하며 공감하는 판사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며, 재판에서 당사자들의 호소에 눈물을 흘리고는 한다. 그에 반해 임바른 판사(김명수)는 "재판은 기본적으로 남의 일이다"라는 입장이다. 나는 후자의 입장이 옳다고 본다. 피고가 눈물을 흘리며 감정에 호소하자, 재판을 담당하는 판사가 함께 눈물을 흘리며 공감해준다면 상대방인 원고는 어떤 심정일까? 과연 그 재판이 공정한 재판이라고 생각할까?(드라마에서도 피고가 거짓으로 감정에 호소한 것을 박차오름 판사가 속아넘어가 곤경에 처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판사뿐만 아니라 모든 판사가 그런 식으로 재판을 한다면? 머지 않아 사적 보복을 금지한 근대법의 대원칙이 무너지고 사적 복수가 횡행해질 것 같다는 것은 섣부른 상상일까?
재판은 기본적으로 남의 일이고, 남의 일이어야 한다. 따라서 "피해자가 판사의 가족이어도 그런 형량이 나올까?"라는 물음은 전제 자체가 잘못된 물음이다.
2023. 7.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