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연대
워싱턴에서 방문 일정은 이랬다. 1월 12일 연방에너지규제기관 FERC와 미국 두 번째 규모이지만,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전력 관련 노동조합 UWUA, 13일에는 퍼블릭 시티즌과 최용석의 또 다른 친구 존 카사자와의 면담이었다. 기본적으로 노조 측의 입장을 지지하는 기관이 압도적이었다. 정부 측은 연구단의 해외조사 자체를 사실 별로 신경을 안 쓴 것 같았다. 그 이유는 나중에 다 알게 된 것인데, 정부는 애당초 노사정위원회의 공동연구단 활동을 하나의 요식행위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미 정부가 한전을 쪼개고 민영화하기로 결정한 마당에 이 정책결정의 방향은 절대 바뀌지 않을 것이었으며, 다만 노조를 비롯한 반대세력을 무마하기 위해 공동연구를 진행한다고 생각했다. 과거에도 정부의 정책을 놓고 노동조합을 비롯한 시민사회단체와 유사한 연구를 했지만, 당초의 정부 결정이 바뀐 일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노조의 생각은 달랐다. 물론 정부 정책을 완전히 바꾸지는 못해도 최소한 정책의 보완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고, 이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국내에서의 토론회 등 연구 활동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캘리포니아를 선두로 영국식 민영화가 실패한 해외현장을 보여주면 위원들의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지라는 기대를 했다. 그래서 열심히 준비했다. 해외방문 기관을 노조측을 대표해 섭외하던 최용석은 불과 1년이라는 짧은 전임간부 동안 만났던 해외의 노종조합을 비롯한 모두에게 기관 섭외를 부탁했고, 일사천리고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이 됐다. 구조개편을 경험했던 유럽과 미국, 남미의 노조들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신속하게 정보를 제공했다. 소위 말하는 노동자의 연대, 솔리데리티를 확실히 느꼈다.
UWUA는 미국 전체 유틸리티 산업의 노동자들로 조직된 노조이기에 전력, 가스, 상하수도 등 공익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산업의 노동자가 조합원 대다수를 차지했다. 전국 본부가 마침 워싱턴 DC에 있었기에 일정 조율에도 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UWUA는 지난 주에 방문했던 캘리포니아 공공산업위원회, 즉 CPUC 커미셔너 칼 우드가 활동했던 노조였다. 칼 우드를 통해서 아주 간단하게 섭외가 됐다.
연구단 일행을 맞이한 UWUA 간부는 브라이언 매카시로, 콧수염이 인상적인 단단한 몸매의 중년 남성이었다. 매카시의 뒤를 따라 들어간 회의실에는 여성 간부 1명과 다른 남성 간부 두 명이 짙은 갈색 오크나무로 만들어진 테이블에 둘러 앉아있었다. 연구단과 UWUA 간부들이 서로 인사 후 본격적인 대담이 시작됐다.
안현필 교수가 우선 입을 열었다.
“우리가 사전에 통보한 것과 같이 우리는 대한민국의 전력사업 자유화 추진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해외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미리 자료를 보내드린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현재 한국 정부는 독점 전력회사 한전의 발전을 분할 했고, 다음 단계로 배전을 지역별로 나눌 계획입니다. 최종적 목표는 복수의 발전회사와 역시 복수의 배전회사가 입찰 방식으로 전기를 거래하는 방식, 즉 모든 전력거래는 전력시장에서 진행되는 의무적 풀 시장을 양방향으로 운영하는 것입니다.”
안 교수의 설명이 끝나자 자신을 대외협력 담당 국장이라고 소개한 매카시가 대답했다.
“예, 우리는 한국의 사정을 대충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한국의 전력회사, 한전이던가요? 그 전력회사가 상당히 효율적으로 전력산업을 운영한다는데 왜 분할해서 경쟁을 하려 하지요? 이유를 모르겠네요.”
“자유화가 지금 세계적 추세 아닌가요? 독점이 주는 폐혜를 개선해서 효율성을 높이려는 것이 한국정부의 생각입니다.”
매카시의 말이 끝나자 김창석 교수가 말했다.
“효율성을 높인다고요? 경쟁으로? 그게 무슨 논리인가요?”
매카시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UWUA 재무국장 개리 러프너가 끼어들었다.
러프너의 다소 공격적인 질문에 침묵을 지키던 신중진 교수가 대답했다.
“독점의 비효율성을 경쟁으로 극복하자는 거지요. 지금 영국부터 미국, 캐나다, 호주 전부 전력산업을 자유화하면서 성공적인 결과는 보입니다. 전력산업이 자연독점이라는 논리는 과거의 것이고 이제는 기술의 발달 등의 이유로 경쟁이 가능합니다.”
“경쟁이 더 효율적이라는 증거를 대세요. 독점이 더 나쁘다는 이유는요? 산업의 성격에 따라 경쟁이 실패한다는 것을 다 아시잖아요?”
매카시가 물었다.
김창석 교수는 매카시와 러프너는 어쩔 수 없는 노조 간부라고 생각했다. 변화를 싫어하고 기득권을 지키려는 경쟁을 두려워하는 그런 낡은 사람들.
“제가 알기에는 미국 동부의 PJM 전력시장은 성공적이라고 들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누가 PJM이 성공이라고 했나요? 말도 안 됩니다.”
매카시는 김창석 교수의 PJM 언급에 목소리를 높였다.
PJM이란 펜실베이니아, 뉴저지, 매사추세츠 세 개의 주를 묶은 약자인데, 이 세 주의 전력을 거래하는 전력시장을 말한다. 원래 PJM은 인근 지역의 남는 전기를 사고팔기 위해서 제한적으로 운영됐는데, 뉴욕을 비롯한 다른 지역의 전력회사도 잉여전기를 팔거나 전기가 필요할 때는 또 사는 식의 자연스러운 거래를 하기 시작했고, 미국 내에서도 꽤 운영이 잘 되는 시장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김창석 교수도 PJM을 전력산업 자유화 성공의 사례로 언급한 것이다. 그런데, 매카시는 김 교수의 말에 발끈하며 이를 반박했다.
“노조의 입장은 알겠지만, 자유화는 전체 시민들의 편익을 높이기 위한 결정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노조원들이 구조조정 등으로 일부 피해를 볼 수 있는 것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런 피해를 최소화 하면서라도 사회 전체를 위한 개혁에는 동의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노조원의 권익도 중요하지만 국가 전체의 이익이 된다면요.”
김창석 교수는 기득권 노조에 대한 평소의 거부감을 참으며 나름 논리적인 주장을 했다고 생각했다.
“무슨 명분을 갖다 붙이더라도 우리는 엔론 사태를 잊으면 안 됩니다. 자본이 중심되는 그런 시장에서 자본가들은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이윤을 키우려 노력하지요. 이 과정에서 적절한 규제나 통제가 없으면 결국 소비자가 손해를 봅니다. 노동자들의 불이익도 마찬가지로 커지고요. 노조로서는 이런 결과가 뻔히 보이는 자유화를 당연히 동의못하지요.”
점잖게 생긴 러프너가 김 교수와 매카시의 대화에 참여하며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이후 두 시간 동안 계속된 토론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UWUA는 약자를 보호하는 방법으로의 적절한 규제를 주장했고, 연구단의 정부측 위원들은 시장경쟁의 정당성을 계속 설명했다. 뭐, 사실 이런 가치 판단을 놓고 벌이는 논쟁은 답이 없다. 문제는 실제 현장에서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에 있다. 자유화와 민영화가 반드시 틀리지는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성공한 사례를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성장한 강대국 미국은 여러 차례 규제철폐, 자유화를 통해서 건전한 시장경쟁을 국가 정책의 기본으로 삼아 왔다. 1900년대 초반의 석유산업 자유화로 독점을 깼고, 이후 항공, 장거리 전화, 철도, 금융 등 미국 연방정부는 특정 기업에 의한 독점이나 과점을 용납하지 않는 기본 원칙을 지켜왔다. 대부분 성공이었고 소비자들은 서비스 향상과 가격 하락이라는 혜택을 입었다. 하지만 실시간 생산과 소비, 대체재가 없는 등 전력산업은 좀 다르다. 공동연구단과 UWUA의 논쟁을 지켜보며 최용석은 혼자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