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익숙하게 두려는 것
좋아하는 것 / 꾸준한 것 /
인정하는 것 / 좋은 사람과 함께 하는 것
어쩌다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게 됐는지. 결론을 말하자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잇다가 그렇게 됐다. 나는 영화나 드라마, 웹툰 보기를 좋아한다. 같은 걸 보고 나누는 대화를 좋아한다. 내가 보고 느낀 것을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길 좋아한다. 내 방에 혼자 앉아 차분하게 필사하기를 좋아하고 단순히 글씨를 쓰는 게 아니라 내용이나 톤에 맞게 맛깔스러운 글씨체로 쓰는 걸 좋아한다. 거기에 간단하고 귀여운 손그림 더하길 좋아한다. 무엇보다 한바탕 성취감 느끼길 좋아한다.
잡다해 보이는 작은 취향들은 모두 내가 되는 단서였다. 물론 그걸 잇는 데에는 투지가 필요했지만 두렵고 떨리진 않았다. 쉬웠다. 평가할 사람 없으니 쫄 필요 없었고 어려우면 그만해도 불합격할 리 없으니 마음이 쉬었다. 뭐, 누가 심사를 하겠나. 이 무대에 나밖에 없는데. 다만 느긋하게 두기가 쉽지 않았다. 이걸로 돈을 벌 수 있을지, 얻을 수 있는 확실한 결과는 무엇인지. 주변에 이 길을 가는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었다. 나도 몰랐고 내 주변 사람들도 몰랐다. 세상 기준으로 비롯된 걱정은 좋아하는 순간을 방해하기 쉬웠다. 30년 동안 미뤄온 취향 누리기 시간인지라 익숙지 않아 더 초조했다. 근데 할 게 이것밖에 없었고 재미도 좀 있어서 에이, 모르겠다~ 궁금함을 켜 두고 초조함을 느낀 채로 계속 좋아하기로 했다.
그동안 좋아하는 거든 싫어하는 거든 매일 꾸준한 법은 없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날마다 숙제처럼 하는 건 살면서 단 한 개도 없었다. 하루도 빼먹지 않고 이를 닦거나 세수를 하는 편도 아니다. 심지어 끼니를 거른 하루도 있는걸. 근데도 매일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써서 올린 건 꾸준함의 힘을 믿어서였다.라고 말하는 게 거짓말은 아닌데, 그보다 큰 이유가 있다. 앞서 말한 대로 내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는 게 싫어서. 무섭고 두려워서.
회사를 관두니 신분만 사라진 게 아녔다. 하루를 열고 맺는 이음새도 사라져 버렸다. 평일과 주말은 더 이상 구분할 필요가 없는 낱말이 됐다. 그래서 매일 올린 거다. 아무도 인정 해 주지 않지만 내가 나의 하루를 인정하기 위해서. 짧든 길든 그건 됐고, 완성도는 둘째 치고! 일단은 매일 쓰고 그려서 꾸준히 올리기로 한 것이다. 인정받기 위해 사는 삶에 오래 길들여졌으니 한순간에 욕구를 지우기 쉽지 않았다. 지워야만 한다는 인식을 갖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우선은 나한테 인정받으려고 쓰고 그렸다. 하지만 여전히 나보단 남들한테 인정받고 싶었다.
친구들을 만날 때면 손그림과 손글씨를 쓰는 손바닥만 한 노트를 들고 다니며 보여줬다. 내가 무얼 하며 지내는지 무얼 재미있어하고 있는지, 뭐가 고민인지도 말했다. 반응해주고 응원해주길 바라며. 다행히 내 곁에는 아무도 내 길을 쯧쯧 하는 사람이 없었 다. 가끔 만나는 사이니까 당연했던 걸까? 아무튼 잔병이 많고 기력이 약했던 나였기에 가족도 친구도 가까운 지인도 몸의 건강을 먼저 걱정해주었다. 내가 즐기는 것을 존중해주었 다. 그걸 하면 어떻게 돈 버냐는 말을 묻는 사람이 가끔 있었지만 단순한 호기심의 질문이었지 질문인 척하는 평가나 충고, 조언은 아니었다. 실은 그런 뉘앙스를 풍기는 사람은 만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