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혜영 May 02. 2022

아이의 방

    오래된 서류들을 담아놓은 파일 함을 뒤적이다 이상한 편지를 발견했다. 편지라고는 하지만 종이는 공책에서 뜯어 쓴 변변치 못한 것인데다가 색깔마저 누렇게 변한 것이, 뭐가 그리 귀중하다고 버리지 못하고 챙겨 넣어둔 것일까 궁금해서 들여다보니 몇 자 쓴 글 밑에 엉성한 사인이 있고 날짜까지 적혀있다. 희미해진 글자를 돋보기를 쓰고 들여다보니 아들 “딘”의 열 살 때 반성문이다.  


  [나는 왜 엄마가 화가 났는지 압니다. 엄마가 방을 깨끗이 치우라고 했는데 엄마 말을 안 들었습니다. 그래서 방이 지저분합니다. 동생 디이와도 싸웠습니다. 디이가 울었습니다. 앞으로 절대 디이를 울리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방을 깨끗하게 정돈하고 엄마 말을 잘 듣겠습니다]


그 해 그날, 이 아이는 세 가지의 잘못을 저질렀던 것 같다. 동생을 울리고 방을 쓰레기통으로 만들고 엄마 말을 안 들었던 죄목이 낱낱이 드러나 보인다. 그래서 아마 나는 화가 나서 야단을 치고 반성문을 쓰라고 했었나 보다. 억지로 쓴 흔적은 보이지만 엄마가 쓰란다고 책상 앞에 얌전히 앉아 반성문을 쓰는 개구쟁이가 그리 흔할까…. 그 반성문을 쓰고 엉성한 사인까지 해놓았지만 개과천선해서 그 이후 다시는 동생을 안 울리고 방을 안 어지럽히고 엄마 말을 잘 듣는다는 약속을 잘 지켰을는지는 의심스럽다. 내 기억 속에는 항상 그 애 방 한가운데에선 쓰레기통과 거덜 난 시리얼 박스가 함께 뒹굴었었고, 동생은 오빠와 악악대며 싸우고 분해서 울곤 했었고, 그리고 엄마 말 좀 들으라고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소리소리 질러대서 목이 아프던 내 모습이 남아있다.


 이제 그 애의 방은 모델 하우스에 있는 남자아이 방처럼 깨끗이 정돈되어 있지만 옷장에 든 퇴역 군인의 퇴색한 군복처럼 맥이 빠져있다. 방 안 가득히 굴러다니던 장난감들이 만화책으로, CD로 엉망이 되더니 슬그머니 남자용 로션과 헤어젤이 대신 커다란 거울 앞에 자리를 잡았었다. 그것들은 다 사라져버리고 지금은 텅 비어 서늘하고 묵직한 먼지가 주인이 된 방. 전에는 지저분한 것이 보기 싫어 열려있는 문을 부지런히 닫아 버렸는데 이제는 텅 비어 먼지 낀 방이 싫어서 문을 닫는다. 


이 반성문을 쓸 때쯤이면 아마 “딘”이 4학년 때쯤이었을 것이다. 이 개구쟁이의 B로 가득한 성적표를 보며 “어째 너는 A는 하나도 없고 B만 있냐?” 멍청한 질문을 하니까 대뜸 한다는 소리가 “나는 스페셜한 사람이 아니에요, 보통 사람이에요. 레귤러란 말이에요. B는 Good이고 나는 Good이면 좋다고 생각하는 보통 사람이에요.” 했던 그 말이 잊히지 않는다. 딴 집 아이들은 성적표를 받아오면 온통 A로 덮여있다고 자랑들을 해대는데 이 아이는 쩨쩨하게 B로 만족하니 참으로 나는 한심한 아들을 두었구나, 한탄했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까짓 성적표가 뭐 그리 대수냐. 수준 높은 철학을 어릴 때부터 가진 아들을 둔 행복한 엄마다, 고 생각하면 될 것을…. 연륜이 깊어지면 이 정도로 넉넉해지는 것일까…? 


“딘”은 정말 그가 선언했던 보통 인간의 삶을 얌전하게 살고 있다. 나는 이 엉성한 사인이 있는 반성문(?)을 다시 접어 잘 간직해 놓았는데 언젠가 그가 아버지가 되는 날 액자에 넣어 선물로 줄 생각이다.

작가의 이전글 통증, 그 무서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