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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물선 May 09. 2024

학교/잇시키 마코토

밤이 오면 우리는 일어나서 학교에 갔다.     


학교는 바람 부는 넓은 들판에 있었다. 우리는 언제나 풀 위에 느긋하게 드러누워 공부했다. 그래야 밤하늘의 칠판이 잘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 선생님은 어둠의 망토를 걸쳤고 흰 구름 같은 머리가 덥수룩했다. 선생님은 별을 분필 삼아 칠판에 글씨를 쓰고 온갖 지식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가을이 끝나갈 무렵 선생님은 우리에게 졸업시험 문제를 냈다.

“가을에 대해서 생각한 바를 발표하세요.”     


단풍나무 잎은 이렇게 대답했다.

“가을이 되면 우리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해서

얼굴이 저절로 붉어집니다.

아무리 도망쳐도

우리의 붉은 얼굴이 수면에 비칩니다.”     


다리가 하나 떨어진 방아깨비는 이렇게 대답했다.

“세상은 기쁨의 악장과 슬픔의 악장이 번갈아가며 반복되는 거대한 교향악입니다. 나는 기쁨을 감지하는 재주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슬픔을 감지하는 데는 서툽니다.

가을이 되면 나는 다음 악장이 시작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다음 날 밤에는 둘 다 더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마침내 학생은 나 혼자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큰 소리로 외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면서 내 답안을 완성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선생님이 새로운 지식을 밤하늘 칠판에 쓸 때마다 하얀 분필 가루가 별똥별처럼 내 얼굴에도 몸에도 쏟아져 내렸다. 내 온몸이 야광 페인트를 칠한 듯 빛을 발할 무렵 드디어 나는 답안을 완성했다.


“죽어가는 생명의 흐르는 피로

산도 들도 새빨갛게 물듭니다.

그것이 가을입니다.”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를 광장 한복판의 가지를 펼친 커다란 나무 아래로 데리고 갔다.

단 한 그루 남은 커다란 나무의 열매는 옅은 색으로 익어서 빛났다. 그것은 흡사 한밤에 빛나는 또 하나의 태양이었다. 나는 그 열매를 따서 입에 물었다.     


그것이 내 졸업식이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죽은 장수풍뎅이가 되어 개미떼에 이끌려 검은 구멍으로 끌려들어 갔다.



본 시는 <암호해독사>라는 시집에 수록된 잇시키 마코토의 시 <학교> 이다. 이 시의 시적 정황은 이러하다. 시적 화자는 학우들과 함께 밤에 자연의 학교에서 지식을 배운다. 졸업 시험문제에 답한 학우들은 학교에 나오지 않게 되고 화자는 마지막으로 남겨져 답을 찾기 위해 애쓴다. 답을 완성한 화자는 학교를 졸업한다. 시적 구조는 얼핏 단순해 보이지만 여운은 단순하지 않다.


<학교>에서 화자는 환상적 배경과 설정 속에는 삶 자체의 알레고리화된 부조리와 부조리라는 관념 자체를 넘어서는 풍경을 드러내고 있다. 그 지점에서 이 시는 설명할 수 없는, 설명될 수 없는 세계를 드러낸다. 이 시에서 작가가 환상성이 내포된 언술 방식을 선택하고 구현한 것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풍경을 아우르며 발생시키는 감각만으로는 부족한, 그 너머의 감각과 영역을 구현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으로 이해해야할 것이다.


‘우리’는 ‘밤’에 학교에 간다. ‘학교’는 자연의 학교이다. 밤하늘이 칠판이고, 별이 분필. 선생님은 어둠의 망토를 걸쳤다. 일견 목가적이기도 하고 비전의 지식을 위한 학교이기도 한 것이다. ‘자연’이 ‘학교’가 되는 것은 동화의 논리이며 이는 유사성의 논리를 바탕으로 한다. 밤하늘 어두운 색과 칠판의 색, 분필의 흰 색과 별의 밝은 색이 그러하다. 이와같은 동화적 논리는 ‘학교’라는 시적 설정을 전개하는 배경의 근거가 된다. 학교라는 배경이 설정되니 '졸업 시험'이라는 설정의 당위성이 발생하게 되고, ‘단풍나무 잎’이라던가 ‘다리가 하나 떨어진 방아깨비’와 같은 학우들의 설정도 내적 인과를 획득하게 된다.

각각의 학우들은 그들 나름의 졸업 답안을 제출한다. 개별 답안들은 가을의 특성이자 졸업시험 답안지 제출자인 개별 학우들의 특성을 매개하여 인간성에 대한 성찰을 드러낸다. 이런 식이다. ‘단풍나무 잎’은 개별자가 겪는 고독, 고립, 소외(‘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와 개별자가 지닌 죄의식, 수치심(‘얼굴이 저절로 붉어집니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러한 반영적, 숙명적 성찰과 주체가 그러한 성찰적 인식으로부터의 근본적 결별과 망각함이 불가능함을 이야기한다(‘아무리 도망쳐도 우리의 붉은 얼굴이 수면에 비칩니다’).

‘다리가 하나 떨어진 방아깨비’의 재현적 이미지는 명백히 꽁지가 긴 턱시도를 입고 있는 형상과 맞닿아 있으며 종종 아이들에 의해 포획당했다가 한쪽 다리를 잘린 채 도망치는 곤충의 모습이기도 하다. 가을을 맞아 졸업시험을 맞는 '방아깨비'는 그러한 재현적 방아깨비이자 삶과 죽음, 슬픔과 기쁨의 양 측에 발을 담근 양가적 존재이다. 까딱거리며 박자를 형성하는 방아깨비의 이미지와, 턱시도의 유사 시각-이미지, 세상이라는 기쁨과 슬픔의 교향곡은 감각의 근방역을 형성한다. 방아깨비의 답안지 중 ‘나는 기쁨을 감지하는 재주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슬픔을 감지하는 데는 서툽니다’ 라고 하는 언술은 상당히 묘한 뉘앙스를 풍기는데, 이는 인간 본성을 한 특징적 측면을 시사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기쁨은 항상 익숙하게 감지하고 능숙하게 기뻐하곤 한다. 다만, 슬픔은 항상 낯설다. ‘감지하는데 서툴다’는 것은 ‘슬픔을 감지하더라도 능숙하게 잘 대처하지 못한다’이거나 ‘슬픔을 능숙하고 예민하게 잘 감지하지 못한다’ 이거나 둘중 하나일 것이다. 전자일 경우는 슬픔에 서툴게 대처하는 경우일 것이고, 후자인 경우는 슬픔에 마비된 경우일 것이다. 방아깨비는 절름발이며, 가을이 되면 다음 악장이 시작되기 전 기쁨과 슬픔의 악장 중 어떤 악장이 시작될지 알기 전에 일어선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기쁨과 슬픔 중 어떤 악장인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가을은 어떤 악장이든 터져나올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런 계절이지만, 방아깨비는 감지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설 준비를 하는 존재이다.


졸업시험을 마지고 난 학우 둘이 그 다음 시간부터 나오지 않는 다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그 둘이 졸업했고 시적 화자인 ‘나’만이 남겨졌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답답함에 ‘나’는 더더욱 열심히 공부하며 온몸이 빛을 발하게 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졸업 시험의 답을 말하게 된다. 그런데 그 답이란 ‘죽어가는 생명의 흐르는 피....그것이 가을입니다’ 라는 것이다. 앞서 졸업 시험에 대한 대답의 주체와 그 대답 사이에서 발생한 연결성을 보았다. 그리고 그 대답으로 인해 주체들이 맞는 구체적인 인과적 과정이나 흐름을 보지는 못하고 단지 학교에 부재하게 된 사후적 세계의 결과만을 보았다. ‘나’는 ‘가을’을 ‘죽어가는 생명’의 ‘흐르는 피로 물드는 것’으로 보았고 그 결과 ‘한밤에 빛나는 태양과 같은 빛나는 열매’를 따서 물게 되었다. 이는 일종의 사후적 인과 결정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다. 내가 인식하여 결정한 것이 나를 결정한 것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감각이 발생한다. 내가 졸업시험으로 답을 내린 것, 그것은 일종의 절정이다. 죽음과 생명이 ‘새빨갛게 물듬’이라는 색채로 형상화되어 절정을 이루는 현존재적 감각이다. 죽음과 대비되는 생명의 감각이라 할 수 있다. ‘죽어가는 생명-흐르는 피’의 관계성은 ‘한밤-빛나는 또 하나의 태양(열매)’의 관계성과 대응한다고 할 수 있다. ‘가을’을 이루는 죽음 앞의 커다란 생명 그 자체가 ‘나’이고, 그 생명-열매를 따버림으로써 수확해버리는 것, 즉 나의 생명을 수확해 버려서 입에 물어버림으로써 ‘나’를 규정하게 된다. 이는 망자의 입에 동전을 물리듯, 시적 자각- 현존재성이 시적 자아의 앞에 드러남을 보여준다.

  

‘나’는 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비전을 알게 되고, 장수풍뎅이가 되며 검은 구멍으로 끌려들어 가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냉정한, 냉감한 죽음, 타자화된 ‘나’의 차가운 죽음을 감각하게 된다. ‘결국은 이것인가?’라고 말하게 되는 차원의 죽음을 감각하게 된다.

그런데, 이 마지막 연을 얼핏 띄엄띄엄 보게 되면 마치 이 시가 말하는 것이 "삶이란, 인생이라는 학교를 다니는 것이고, 우리는 답을 찾기 위해 애를 쓰고, 함께 애쓰며 살다가 그 답을 찾은 사람이 어딘가로 먼저 졸업해버리는 것 같이 초조한 마음으로 애를 쓰고 사는 것이며, 결국 우리가 답을 찾아냈다는 그 환희와 영광의 순간이 찾아온다 하여도, 그 순간은 잠시일 뿐, 그 답변의 순간까지 우리는 우리가 누군지에 대해서도 궁금해하지 않으며 살다가 죽음 뒤의 순간에나 스스로의 세계에 내던져진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슬픈 모습을 그려낸 것"처럼 읽힐 수도 있다. 앞서 언급한 허무적, 부조리적 알레고리의 형상화로 읽힐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렇게 도식화되거나 표면적인 의미화 구조로 읽히지 않는 점이 이 시가 가지고 있는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첫 번째로 이 시에서는 학교로 묘사되는 자연의 정경이 시 전반에 품고 있는 이미저리가 마지막 연의 반전을 위해 소모되기 위해 형성었다고 생각하기엔 지나치게 강력한 내적 호소력을 가지는 방식으로 쌓아져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의 진실을 형상화하고 있다. 환상성이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은 환상성이 가진 이미저리를 독자가 체험케 하는 경험에 성공하게 할 때, 즉 환상성의 이미저리 설득에 성공할 때 이루어진다. 이 시를 따라 읽다보면 독자로서 학교를 함께 체험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밤의 학교에서 풀밭에 눕고, 어둠의 망토를 걸친 선생님을 만나는 듯 하고, 별이 지나가는 하늘의 칠판을 보는 듯 하고, 얼굴을 모르는 단풍나무가 마치 답안지로 자신의 비밀을 답으로 말하는 듯하며, 그 비밀-수치심이라고 하는 보편감각에 나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게 되는 그런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나도 이 학교를 졸업하기 위한 답을 찾아야만 할 것 같은 조급한 마음과 너무나도 삶의 진리치와 닮은 그 답을 찾았을 때 주어지는 보상과도 같은 열매가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은 환희, 그리고 그 절정과 그 절정 이후 갑작스러운 낙하의 감각과 황량함. 그 고조된 감각이 어디로 갔는지 허망함과 해소되지 않는 의문의 낯섬 사이에 발생하는 괴리를 감각하게 만드는 방식이 마지막 연을 다시 살펴보게 만든다. 왜냐하면, 마지막 연에서 발생하는 기묘한 감각은 단순한 허탈함과 황량함이 아니라 일종의 카타르시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해당 연에서는 일종의 시점 변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해당 연에서 ‘나’는 자신의 졸업식(죽음)을 바라보게 된다. 그 전까지 ‘나’는 자연 속에 있으며 세계를 보는 존재였고 타자를 보는 존재였다. 배우는 존재, 아름다운 학교를 다니는 존재였으나 ‘졸업식’을 맞이한(나는 이것이 일종의 꿈에서 깨어남 상징한다고 생각해본다...왜냐하면 그동안 밤에 일어나 학교에 다녔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이전의 상황으로부터 졸업한 시적 주체이자 다른 차원의 존재로 다시 태어난 나이자 현실적이고 물질적 존재인 죽은 장수풍뎅이로써의 외피를 자각하고 끌려 들어가게 되는 나이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 모순적인 지점이다. 왜냐하면, 이미 끌려 들어가고 사라진 나라면, 지금 이 진술은 누구로부터, 누구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가? 시는 현재적 진술이다. 과거에 일어났던 일은 현재의 시적 화자가 누군가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특히 ‘나’에 대한 이야기라면 특히나 그렇다. 그렇다면, 지금 과거의 ‘나’, 졸업한 ‘나’를 기억하는 시적 주체가 남아있다는 암시성이 마지막 연에 남게 된다. 이것은 마치 시적 주체의 소멸을 암시하는 마지막 연의 내용적 측면과 배치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시적 화자이자 ‘나’는 어딘가에서 남아 이 모든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는 셈이며 그것은 학교와 학교의 졸업식, 그리고 시에 그려지지 않은 졸업식 이후의 정황까지를 모두 시에서 기능케 하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에서 이 시는 숙명적인 삶의 부조리적 풍경 그 너머까지, 즉, 그릴 수 없는 풍경까지 여백으로 그리는 시가 되는 셈이며 오히려 냉감한 죽음의 감각을 시적 자아인 ‘내’가 오히려 강렬하게 ‘감각’하도록 하는 시가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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