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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물선 May 09. 2024

I WED A TOY BRIDE/이상

1 밤

장난감신부살결에서 이따금 우유냄새가 나기도 한다. 머지 아니하여 아기를낳으려나보다. 촛불을끄고 나는 장난감신부귀에다대고 꾸지람처럼 속삭여본다.
“그대는 꼭 갓난아기와 같다.”고……
장난감신부는 어둔데도 성을내고대답한다.
“목장까지 산보갔다왔답니다.”
장난감신부는 낮에 색색이풍경을암송해가지고온것인지도모른다. 내수첩처럼 내가슴안에서 따근따근하다. 이렇게 영양분營養分내를 코로맡기만하니까 나는 자꾸 수척해간다.

2 밤

장난감신부에게 내가 바늘을주면 장난감신부는 아무것이나 막 찌른다. 달력. 시집. 시계. 또 내몸 내 경험이들어앉아있음직한곳.
이것은 장난감신부마음속에 가시가 돋아있는증거다. 즉 장미꽃처럼……

내 거버운무장武裝에서 피가좀난다. 나는 이 상채기를고치기위하여 날만어두면 어둠속에서 싱싱한밀감을먹는다. 몸에 반지밖에가지지않은 장난감신부는 어둠을 커튼열듯하면서 나를찾는다. 얼른 나는 들킨다. 반지가살에닿는것을 나는 바늘로잘못알고 아파한다.
촛불을켜고 장난감신부가 밀감을찾는다.
나는 아파하지않고 모른체한다.




 이 시는 이상의 < I WED A TOY BRIDE> 이다. 쓱 읽고 난 뒤에도 전율과 같은 낯선 감각을 야기하는 시이다.  이 시는 도착과 위장, 반어, 아이러니로 존재와 대면하여 존재의 불능성 그 자체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반영적이고 압축적으로 현실을 경유해 설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를 드러내, ‘존재의 맛’을 들이민다. 현존재를 증거 하기 위한 존재의 근거들은 모두 정황적인 증거들, 빛의 반사판일 뿐이다. 그것들은 존재의 증거이지만 존재, 그 자체가 아닌 것들이다. 존재의 그림자는 빛 경로상의 빛을 가리며 ‘존재’를 승인케 하지만 존재 그 자체를 감각케 하는 존재의 다질적/종합적 특성은 아니다. 차라리 존재가 세계에 발현하는 효과 중 하나라고 봐야 할 것이다. 말 그대로 존재의 그림자이자 존재의 현상적 특질이다. 이 리뷰를 작성하는 중 존재라는 단어를 너무 남발해서 사용한 듯한데, 이는 과문한 탓에 이 시에서 ‘Dasein’으로서의 개념과 맞닿아 있는 것으로 감각되는 존재-감각-이미지를 지칭하는데 더 명확히 표현할 개념어를 떠올리기 어려운 탓이다.   


이상의 <I WED A TOY BRIDE> 도 존재론의 시라 할 수 있다. 근대성에 기반해 비치고 있는 울퉁불퉁한 불능성의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을 핥는 풍경의 시에 가깝게 읽힌다. 지금 내가 보는 ‘나’는 어떤 존재인가에 관한 시인 셈이다. ‘장난감신부’를 보는 ‘나’의 시선과 ‘장난감신부’와 ‘나’의 관계성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 드러난다. 이 시는 일반적으로 흔히 사용되는 상투적-관용적 시어를 사용하지 않고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중심 시어들이 환기하는 이미지와 감각의 파장을 먼저 정리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 장난감: 유희, 욕망, 쾌락, 가벼움, 소비, 소유, 다툼(아이들끼리의 소유 다툼), 역할, 전이, 어린이, 천진함
· 신부: 순결, 애정, 애착, 욕망, 성애, 흰색, 가벼움, 영원
· 장난감신부: 위의 두 가지 단어로 인한 감각의 근방역이 형성됨. 수많은 모순적이면서도 도착적, 아이러니컬한 이미지의 근방역이 형성됨. (후술 하겠지만, '장난감신부'가 단순히 관념적인 시적 대상이 아니라 화자와 구체성을 지니고 기능하는 주체로 설정되어 이 관계성을 통해 시적 화자의 특성을 반영한다.)
· 아기: 무구, 순진, 미성숙, 희구 욕망
· 바늘: 예리, (치명적이지 않은) 상처, 자각, 가책, 불편, 해소
· 밀감: 생명력, 치유, 따듯함, 부드러움, 액체성, 터질듯한, 장난감신부에게 부재하는 것

시는 1 밤과 2 밤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1 밤 부분은 ‘장난감신부‘에게서 우유 살내음을 맡고 희롱을 건네는 화자의 모습, 그리고 목장에 다녀왔다는 장난감신부의 이야기를 듣는 화자의 정서적 반응으로 구성되어 있다. 2 밤 부분은 ’ 장난감신부‘가 화자가 준 바늘로 '나(화자)'를 비롯해 화자의 경험이 있을 만한 곳을 찔러대는 상황, 그리고 이에 대해 밀감을 먹으며 상처를 회복하는 ’나‘와 다시 화자를 찾아오는 ’ 장난감신부‘와 이에 대한 ’나‘의 반응의 정황을 그리고 있다.


우선, 이 ’ 장난감신부‘라는 설정부터 환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갈림길이 하나 발생한다. 이 ’ 장난감신부‘를 1) 연인이나 어떤 인격적 대상을 부르는 사적 호칭이나 은유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말 그대로 2) 어떤 대상의 의인화로 받아들일 것인가. 1)과 2)의 갈림길에 따라 이 시의 환상성은 그 강도를 달리한다. 그리고 ’ 장난감신부‘에 대한 시적 주체가 지닌 의식의 반영적 투사 또한 그 강도에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장난감신부'의 설정이 실제 인격적 존재인가, 아니면 인격이 ’ 부여된 ‘ 존재이냐에 따라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쪽 독해를 선택하는 것이 더 적절한지 그 근거를 시 내부에서는 찾기가 어렵다. 따라서 ’ 장난감신부‘는 1)과 2)가 겹쳐진 존재로 읽거나 그 시적 ’ 환상성‘, 즉 '장난감신부'라는 시어가 환기하는 직관적 모호성의 파장을 기각하지 않은 상태로 독해할 수 밖에는 없을 것이다.


’ 장난감신부‘에게서 느껴지는 살결의 우유 냄새는 ’ 장난감신부‘에 대한 에로스를 환기한다. 그리고 이 우유 냄새는 젖냄새를 환유하고, 아기를 환유한다. ’ 아기‘는 화자의 희구욕망이자 미성숙한 자아 인식과 욕망을 드러내는 매개물로 쓰인다. “그대는 꼭 갓난아기와 같다”는 말은 일종의 밀어이자 희롱, 자기 투사의 말, 생명성의 희구에 대한 언사라 할 수 있는데, ’ 장난감신부‘는 이에 대해 ’ 어둔데도‘ 즉, 희롱의 배경적 정황에도 불구하고 분위기에 맞춰 받아주지 않고 '성을 내고 대답한다 ‘. 이는 '장난감신부'의 천진성을 환기한다. “목장까지 산보갔다왔답니다”라는 대답에는 우유 냄새가 나는 이유, 그리고 갓난아기가 아니라는 의미까지 모두 함축한 답변이 들어있다. 이는 ’ 장난감신부‘의 아이와 같은 천진함과 ’나‘에 의해 전유되지 않음, 그리고 오히려 ’ 장난감신부‘에게 어떤 강도에 해당하는 실제성을 부여한다.  ’나‘는 '장난감신부'의 그 대답을 수긍하는 듯도 의심하는 듯도 하다. ’ 장난감신부‘가 산책을 다녀왔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진짜 산책을 다녀온 게 아니라 색색이 암송을 해온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과, “가슴안에서 수첩처럼 따근따근한” 것처럼 실체성을 느끼게 하는 실체적 감각의 양가적 갈림길에서 화자는 이 ’ 장난감신부‘의 환상성을 온전히 승인하거나 기각하지 않는다. 화자의 태도로 미루어볼 때 '장난감신부'의 실재에 대한 미확정 그 자체는 화자의 인지적 갈등 요소는 아닌 듯하다. 오히려 우유 살내음의 감각이 다르게 변주되어 지시된 '영양분내''먹을 수는 없고 코로 맡기만 한다'시적 인식과 이것이 화자 스스로를 수척하게만 만든다는 ’장난감신부‘와 ’나‘와의 관계적 인식이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기실 화자는 ’장난감신부‘에게 에로스적 생명력과 일종의 ’초야‘ 같은 생명력의 관계성을 기대하지만, 이러한 관계 맺음의 시도는 기각당하고, '영양분내를 코로 맡을 수밖에 없는' 관계라는 사실에 대한 주관적 인식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으로 1 밤이 마무리된다. 1 밤에서 드러나는 것은 ’나‘는 ’장난감신부‘를 전유하고자 하지만 사실 전유하지 못하고 오히려 ’장난감신부‘와 ’나‘와의 관계성에 대해 반영적으로 ’ 자신의 모습‘에 대해 깨닫게 된다. 이 상호관계성에서 내가 ’장난감신부‘를 전유하고자 하는 행태는 꽤 도착적이고 사실은 변태적이라 할 만한 부분도 있다. 사실 ’장난감신부‘라는 명명부터 그러한 뉘앙스를 풍기며 이는 일종의 피규어나 대상화된 도착적 성애의 욕구적 명명을 드러내고, 우유와 아기의 이미지가 에로스적 이미지로 연결 접속되는 부분(’ 촛불을 끄고 나는 장난감신부귀에다대고 꾸지람처럼 속삭여본다')은 특히 그러하다. 그런데, 이러한 주체특성의 드러냄이 ‘장난감신부’에 의해 기각되어 시무룩해져 스스로 납득하는 부분은 일견 코믹하기까지 하다. 그 정도로 이러한 도착과 일종의 변태력은 파괴적이거나 위험한 것이 아니며, 자기 반영적인 형상의 것이지만, 예리하며 위트 있는 것, 모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2 밤은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간다. ‘장난감신부‘는 ’나‘에게 핀잔을 주는 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 ’ 내‘가 준 바늘로 ’나‘를 대리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지점은 ’장난감신부‘에게 바늘을 쥐어주는 설정인데, 만약 1 밤에서 아기와 같은 천진하면서도 잔인한, 비합리성의 이미지 파장이 ’장난감신부‘에게 덧씌워지지 않았더라면 ’ 바늘‘이 ’ 장난감신부‘에게 부여되는 설정은 유효하게 작동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내적 인과의 설정으로 인한 설득력은 매우 감각적으로 작동한다. 이제 ’장난감신부‘아무 것이나 마구 찔러댄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사실 찔러대는 것은 하필이면  ’달력. 시집. 시계. 또 내몸 내 경험이들어앉아있음직한곳만을 마구 찔러대고 있다. 이곳들은 기억과 경험, 모던한 근대적 자의식, 후향적으로 ’나‘를 구성하는 것들이 있는 곳 들이다. 앞서 '장난감신부'가 화자를 대리한다고 이야기한 이유는 명확하다. ’장난감신부‘에게는 바늘이 생래적으로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바늘‘을 주지 않았으면, 즉 ''를 찌르게 허용하지 않았으면 발생하지 않았을 상황이다. 이는 1밤에서 보여준 모습의 압축적 진술이기도 하다. 재미있는 것은 ’장난감신부‘에게 주어진 것이 ’바늘‘ 이자 ’가시‘라는 것인데, 이것들은 모두 치명적이지 않은 물성의 흉기이다. 즉, 바늘로 아무리 찔러도, 가시로 아무리 찔러도 고통이나 자각은 존재할지언정 죽음이나 비가역적인 손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전적 인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바로 이 인식이 ’장난감신부‘와 ’나‘와의 관계성을 배타적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리고 이 시의 변태적/도착적 분위기의 근방역을 강화하기도 한다.
’거버운무장‘이란 앞서 언급된 ’달력, 시집, 시계, 또 내몸. 내 경험이 들어앉아있음직한곳‘과 이어지는 시어로 자의식의 상징어라 할만하다. 스스로 인식하고 있는 삶의 외피이거나 삶의 무기. 세계를 인식하고 조율하는 인지적 장악력일 수도 있으며, 자아정체성, 자존감일 수도 있다. 재미있게도 ''''가 허락하여 ’장난감신부‘가 ''를 상처입히도록 한 뒤에 ’밀감‘을 먹으며 회복하기 위해 숨었는데, 이제는 ’장난감신부‘가 ''를 찾기 시작한다. 주객의 역전 관계가 발생하는 것이다. 여기서 ’밀감‘은 꽤나 모호하거나 피상적이지만 감각적으로 이해하자면 근대적 이성이나 정체성(시계, 달력, 거버운 무장 등)근원적 생명성(갓난아기, 우유 등)에 비추어 발생하는 자기 혐오나 자책, 자기부정의 논리(가시, 피, 상채기)로부터 삶을 회복시키기 위해 탐하는 무엇일 것이다. 그것은 ’밀감‘의 이미지와 맞닿이 있는 달거나, 탱탱하거나, 물이 많은 그 무엇일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의 특징은 분명히 ’나‘만이 향유할 수 있고, 시의 뒤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장난감신부‘는 향유하거나 소유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몸에 반지밖에가지지않은 장난감신부는 어둠을 커튼열듯하면서 나를찾는다‘라는 시구에서는 좀 섬뜩한 에로티시즘의 이미지가 발생한다. 1 밤에서 ''가 도착적으로 추구하던 에로스가 2 밤에서는 오히려 숨어있는 ''를 덮쳐온다. 2 밤''는 아마 1 밤의 마지막 행에서와 같이 수척해져있는 ''였을 것이다. 이제 알 수 있다. 약간의 도식화를 해보자면 ’나‘는 도착적 관계성의 회로 속에서 쇠약해져가는 존재임을 자각하고 있는 존재임을. 그리고 그 관계성이 스스로의 존재를 지속적으로 자각하게 만드는 자극임을. 심지어 반지조차도 바늘로 착각할 정도로 예민하거나 고통스러운 상태라 할지라도 말이다. ’얼른 나는 들킨다‘라는 시구는 얼핏 보면 마치 ’내가 선뜻 장난감신부에게 빨리 들켜준다‘라는 뉘앙스로 읽힌다. 그러나 앞서 말한 그로테스크한 에로티시즘의 습격이미지와 바로 이어지는 ’반지가살에닿는것을 나는 바늘로잘못알고 아파한다.‘의 감각으로 인해 이는 그저 피동적으로 ’금방 들켜 버리고 만다‘라는 뉘앙스로 읽히는 문장이 된다. 왜 ’장난감신부‘는 ’반지‘ 밖에 가지지 않았을까. 그리고 왜 ’나‘는 ’바늘로잘못알‘았을까. 그것은 ’장난감신부‘에게 ’나‘는 아기를 줄 수 없고, ’장난감신부‘는 아기를 낳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는 그 대신 ’바늘‘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부‘이기에 반지를 당연히 가지고 있으나 반지 ’밖‘에 가질 수 없다는 일종의 언술적 아이러니는 ''가 준 ’바늘‘로 오인되는 시적 운명을 가지게 되는 것인 셈이다. ’반지‘가 ''에게 닿았으니 ''가 아픈 것이고, ’바늘‘로 ''가 착각을 한 것일 테니 ''와 ’장난감신부‘는 지금 접촉하고 있는 상태이다.
마지막 두 행은 굉장히 오묘하다. ’장난감신부‘는 ’촛불을 켠다‘. 그리고 심지어 ’밀감‘을 찾는다. 그리고 ’나‘는 ’아파하지않고‘ ’모른체한다‘. 1밤에서 ’나‘는 촛불을 껐다. 그러나 ’촛불을 켜‘는 주체가 ’장난감신부‘로 이행한다. 능동적 주체의 전이가 발생한다. '나'로부터 '장난감신부'로 이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면은 매개항의 측면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장난감신부‘가 시 내에서 단순한 시적 주체의 인식, 경험의 대상물이나 매개물이 아니라 시적 주체의 반향적 정체성이나 반향적 존재성이 전이된 시적 대상으로 기능하는 면모를 명백히 보여주는 측면이라 할 수 있고, 이러한 특성이 이 시의 언술 전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의 도입부에서는 '장난감신부'가 주체의 특성을 반영하는 대상으로 도입되었다가 점점 주체의 존재를 조건 짓는 반영적 대상으로 오히려 주체보다 더 주체에 대한 통제력이 더 강력해지는 모습을 형상화해서 보여줌으로써 '장난감신부'와 주체의 관계성이 갖는 반영적 특성이 주체 존재를 드러내도록 하는 형태를 취했다고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마지막 두 행의 분석으로 돌아가보자. '촛불을 켠다'는 것은 주도권을 ’장난감신부‘가 가지게 된다는 것이고, '밀감'을 찾는다는 것은 밀감이 곧 ’나‘이거나 ’나‘에게 핵심적인 것, ’장난감신부‘에게 결여된 것, 둘 사이를 가르고 있는 무엇이라는 것일 터이다. 혹은 밀감마저도 제어하려고 하는 ’장난감신부‘의 시도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밀감‘은 진정 무엇일까. ’밀감‘은 분명 ’장난감신부‘로부터 상처를 받아도 회복하게 만드는 '내 존재'의 회복을 위한 고유의 것이며 반영적 자아라 하더라도 ''와 명백한 차이를 둘 수 밖에 없는 ’장난감신부‘와 ''와의 사이를 가르는 그 무엇인 것이다. 빼앗길 수 없는 것일 터이다. 물렁한 것, 상할 수도 있는 것. 껍질 속에 있는 것. 달콤한 것. 그런 것일 것이다. 이 지점이 이 시를 도식적이지 않게 한다. 나를 비추는 것(장난감신부)이 '나'의 의식과 세계에 존재하지만, 그것이 ’나‘는 아니라는 것. ''와 ’장난감신부‘를 구분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밀감‘으로 드러낸다. 심지어 단어 그 자체의 뉘앙스에서 드러내듯이 그것은 ’숨겨진‘ 것이라 ’나‘도 어둠 속에서만 먹을 수 있고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 문장 ’나는 아파하지않고 모른체한다‘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아파하지않고’ 라는 말은 실은 아픈데, 아프지 않은 것으로 한다는 말이다. ‘모른체한다’는 것은 무엇을 모른체한다는 것일까. 첫 번째 가능성은 ‘장난감신부’가 찾는 ‘밀감’에 대해 ‘모른체한다’는 것일 터이다. 왜 이것을 감추는 것일까. 그것은 ‘장난감신부’가 ‘나’의 반영적 자아이기도 하며, 페티시적 대상이기도 하지만, ''존재 본질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거울상은 나의 결핍을 반영하지만, 나의 본질을, 나의 존재적 근원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인식을 드러내는 언술로 읽힐 수 있다. 두 번째 가능성은 이 모든 것들을 모른체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아픔 자체의 인식 자체를 무화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것은 ‘장난감신부’와의 동화, 동질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그다지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장난감신부’자체도 ‘밀감’을 찾는 거울-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며 그 밀감은 앞서 ‘싱싱한 밀감’으로 중요하게 언술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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