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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물선 May 10. 2024

잠깐 본 세상/옥타비오 파스

바다의 밤 속에
물고기, 아니면 번개.
숲의 밤 속에
새, 아니면 번개.
 
육체의 밤 속에
뼈는 번개.
오 세상이여, 모든 것은 밤이다
삶은 번개.
 


이 짧지만 아름다운 시는 멕시코의 시인 옥타비오 파스의 시이다.


시가 구현하는 이미저리와 언술법, 그리고 시가 그려내고 있는 세계의 스케일이 이렇게 짧은 시 안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방식이 놀랍다. 이 시의 ‘의미의 잠재적 차원’이 세계에 드리우는 하나의 덧그림자에 대해 독자는 즉각적으로 유효하다고 감각하게 된다.
어두운 밤바다 속의 물고기를 비추는 순간은 번개가 칠 때이다.
어두운 숲 속의 새가 비춰 보이는 순간은 번개가 칠 때이다.
인간의 몽롱한 일상성과 관성의 육체 속에서 단단하게 존재하여 부러지거나 부딪혔을 때 번개와 같은 통증, 감각을 유발하는 것은 오롯이 뼈이다.

우리는 '살 flesh'로 살고 생명, 육체, 밤을 누리고 있지만 우리 존재의 자각과 핵심은 '뼈 bone'이자 '번개'이다.

'오 세상이여, 모든 것은 밤이다/삶은 번개.'라고 하는 마지막 두 행은 잠재적으로 두 층위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첫 번째, 우리의 삶은 관성적이며 오로지 밤의 삶이다. 그러나 삶 속에서 가끔 번개와 같이 잠깐 목격하는 실존적 자각의 순간이 발생하는 세상이 있다.

두 번째, 이 세계는 애초에 우리의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 세상으로 모든 것이 밤인 세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에서 우리의 삶 그 자체가 번개이며 우리의 삶이란 번개와 같은 속성으로 자각하고 생명에 불을 밝히는 것이다.


시에서는 시적 대상물들의 어떤 개별적 행위도 드러나지 않는다. 시적 주체도 명확하지 않다. 그저 시적 화자는 '잠깐 본 세상'이라는 명명하에 자신이 인지한 세계를 시적 진술로 구축하고 있다. 그것은 우선 감각에 따라 인식된 존재의 원리에 따른다. 엄밀히 말하자면 시적 주체가 존재를 인식하는 원리이자 감각하는 속성을 최소 이미지적 기술 전략을 통해 구현한다.


첫 연에서는 일종의 ‘날이미지’의 언술 전략이 드러난다. 일견 오규원이 보여주었던 바 있는 시적 주체의 인지적 날이미지 제시 방식과 닮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이는 단지 기법적 측면에 한정된 이야기이다.) 앞서 재구성된 문장을 제시했듯이 원래 세계에는 번개가 치고 이로 인해 빛이 발생하여 바닷속에 물고기가 보이게 되는 것이고, 숲에 번개가 치게 되어 빛이 비쳐 새가 보이게 되는 것인데, 마치 번개가 치는 순간 세계의 밤바다와 밤 숲이라는 배경(세계)은 지워지고 그 세계를 인식하는 사람에게는 물고기 아니면 번개, 새 아니면 번개라는 인식의 강렬

한 대상만이 남게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암시를 얻고 간다. 우리가 보는 것은 물고기인가, 새인가, 숲인가 아니면 번개인가?


다음 연에서는 유사성의 논리가 적용되어 시가 전개된다. 육체의 밤에서 우리는 강렬한 번개를 느끼는데, 그것은 뼈(로부터 발생하는 감각)이다. 

이 시에서는 몇 개의 의미의 지층이 기대어 서서 새로운 의미의 지층을 형성하고 있다. 특히 주목해야 할 시어는 앞서 언급했던 '물고기' '새' '육체'와 같은 시어라 할 수 있다. 세 시어는 모두 '밤'에 감춰져 있다 '번개'와 같은 비생명의 근원적 에너지('뼈')와 자각을 통해 드러나는 존재의 '살'이자 '생명'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시에서 드러내는 것은 존재성, 존재성의 자각이다. 그 존재성은  단지 생명도 아니고 단지 자각도, 자각을 유발하는 에너지도 아니다. 생명의 생동과 그 생명의 실체성을 감추는 관성적인 삶의 장막을 걷어내는 자각의 구도를 인식하는 주체를 그려낸 것이다.


단지 인식의 구도를 그려낸 점이 아니라 인식하는 파토스적 주체를 그려낸다는 점에서 마지막 두 행의 언술방식이 설득력이 있다. 시적화자는 말한다 ‘오 세상이여’ 왜 ‘오 세상이여’일까. 그것은 하나의 언술 전략으로써 지금까지 명사형 종결로 끝내던 행들이 하나의 조건절이었다면, 지금 일종의 시적 자각에 대해 ‘선언’ 코자하는 시적화자의 진술이기 때문이다. 이 강조점이 시적 화자이자 주체주된 의도임을 드러내고자 하는 시적 언술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뒤를 이어 아름다우면서도 미묘하게 이러한 시적 자각에 입각한 진술 자체를 종결해서 선언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의 조건절에 해당하는 문장, 즉 ‘모든 것은 밤이다’라는 당위적 위상의 아포리즘적 진술을 먼저 제시하고, 실제 본인이 천명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시적 진술인 ‘삶은 번개’라고 하는 선언은 앞서 반복되었던 의 종결 형식 안으로 포섭해서 언술 한다. 이러한 형식적 완결성은 시의 형식이 시의 의미적 내용마저도 포섭하는 아름다움을 보여주게 된다. 즉, 시의 형식이 의미적 차원마저 포섭하는 형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무슨 이야기냐, 이 시는 모든  문장의 각운이 '번개'로 맞춰진 '번개의 시'이다. 시인은 잠깐 본 세상’이라는 번개 독자에게 던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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