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조금 특이한 관계의 환자와 보호자를 만났다. 78세 여자 환자가 숨이 차고 속이 너무 쓰리다며 휠체어를 타고 내원했다. 병이 많아 이미 15년 이상 다니던 종합병원이 있단다. 최근에는 거동하기가 어려워질만큼 숨이 더 심하게 차고 속이 너무 많이 쓰려 병원을 좀 옮기고 싶다며 찾아온 것이다.
딸인 듯한 보호자와 두께가 7~8센치는 되어 보이는 무거운 의무기록사본을 들고 온 걸 보니 외래에 오기 전에 이래저래 준비를 많이 한 것 같다. 보통 질병이 진행되었거나 새로 증상이 생겨 상급병원으로 옮기는 환자들의 경우 상급병원에 대한 기대가 크다. 본인이 앓고 있다고 들은 병명과 평소 먹던 약봉지만 가져 오면 빅브라더 같은 대형 병원이 환자 자신의 건강 상태나 의료 이용 정보를 ‘어떤 방법’ 으로든 파악해서 자연스레 치료를 이어나가 주거나 경우에 따라 대형 병원의 '급'에 맞는 추가 평가가 포함된 진료를 통해 더 ‘제대로 된’ 치료를 해줄 것이라 기대하고 온다.
물론 지금까지 그런 일은 일어난 적도 없고, 일어날 수도 없다. 병원과 이 나라의 의료 시스템에 대해 환자들이 동시에 지니고 있는 기대와 불신은 환자 자신이 의료 시스템 안에서 무력하다는 자각에서 피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온순해 보이는 환자는 무기력하고 체념적으로 시스템에 의존하고 공격적인 환자는 신호등 꼬리 물기 하듯 시스템에 발을 끼워 넣어 의존하는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이 환자처럼 본인의 증상에 따라 첫 진료를 보면서 이전 병원의 진료기록을 전화번호 두께로 떼어오는 경우가 흔하지 않다. 환자나 보호자가 우리 나라 의료 시스템이 돌아가는 방식에 충분히 익숙해 있거나 환자의 예후에 대해 각별한 관심과 성의가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제한된 진료 시간이지만 성의를 간과할 수 없어 차트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전에 다니던 종합병원의 대여섯개쯤 되는 진료 분과에서 처방했던 약들의 처방 기록만 가득 쓰여 있다. 10년치 정도의 처방전만 두껍게 정리해 가져온 것이다. 마음이 가상하지만 성의가 유효하지가 않다. 그러나 보호자의 성의가 너무나도 뚜렷해 마음이 약해진다. 약 목록을 살펴보니 울혈성 심부전, 고혈압, 이상지질혈증, 당뇨병, 만성 신부전, 알츠하이머 의증, 우울증, 불안장애, 수면장애, 소화장애, 골다공증 정도가 진단명으로 추정이 가능하지 싶다. 어이없지만 하루에 환자가 먹는 약 종류만 40개가 넘는 상황이다. 나도 모르게 이 정도로 약을 먹으면 덕분에 '배는 안고프겠네’ 싶을 정도다. 약물 상호작용이고 나발이고 진료 차트도 진단명도 없고 어떤 진료를 언제 어떻게 받았는지에 대한 기록 자체가 없으니 지금 호소하는 증상에 대해서는 아예 쌩으로 처음부터 검사를 다시 해야만 한다.
기저질환과 현재 증상과의 연관성, 기저 질환의 악화 가능성, 새로운 연관 질환이나 아예 새로운 질환 발생 가능성, 약제 유발 이상반응 등을 머리 속에서 그리며 감별진단을 하려고 하니 내가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한다. 갑갑한 마음에 약제를 하나하나 챠트에 정리하면서 보호자에게
"서류 잘 떼 오시긴 했는데 중요한 병명이나 그동안 치료하시던 내용이 없어요.
일단 오늘 기본적인 상태 파악하는 검사는 내드릴테니까,
병을 정확히 확인하는 검사는 예전 병원 진료 내용 적힌 차트 복사해서 가져오시면 확인하고 내드릴게요.
약은 일단은 지금 드시던 약 며칠간 유지를 좀 하시구요." 라고 진료를 일단락하려 했다.
근데 보호자가 휠체어를 밀고 외래 진료실을 나가려 하는 중에 뒷모습을 살펴보니 환자의 행색이 너무 남루하고 지저분한 것이다. 검은색 나일론 외투에 음식물 찌꺼기 같은 게 붙어있고 머리는 급하게 감았는지 안감았는지 구분되지 않게 덥숙룩하다. 이거 혹시 환자가 집에서 케어를 제대로 못 받고 있는 건 아닌가, 방치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요식 행위처럼 유효하지 않은 의무기록 사본 더미가 거슬린다. 보호자에게 환자와의 동거여부를 묻자 동거는 안 한다고. 그럼 혹시 할머니 동거인은 있냐고 묻자 할머니의 남편 분, 아버님이 함께 사시는데 그 분도 이래저래 썩 상태가 좋지는 않았다는 대답이 보호자로부터 돌아온다.
보호자가 대답하는 뉘앙스가 뭔가 이상해서
“아니 보호자분이 여기 환자 자녀분 아니세요?”
“아니에요.”
“그럼 자녀분이 어떻게 되시는 데요?”
“잘나신 아들하고 딸 있죠.”
“아니 그럼 보호자 분은요. 무슨 관계신데요?”
“며느리요. 옛날 며느리. 지금 말구요.
어머니가 숨차고 속이 너무 아프다고 힘들다고 저한테 전화하셔서 제가 모시고 온 거에요. 전 딴 데 살아요.”
“예전 며느린데 전화 받고서 다니시던 병원가서 이 두꺼운 의무기록을 떼서 오신 거에요?”
“어머니가 저한테 잘해주셨었어요. 지금도 잘 해주세요 그냥”
‘아니 환자분 치매신데...’ 라는 말이 입 밖에 나오다 말았다. 그냥 '복 받으실거에요' 라고 말한 뒤에 ‘내일 모레 뵙겠습니다’ 라고 할 수 밖에 없었던 그런 희한한 관계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