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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물선 Dec 05. 2023

타이레놀의 힘

내 몸과 마음을 남의 몸처럼

가끔은 이런저런 기억을 되살리는 일들이 번거롭고 피로할 때가 있다. 몸이 안 좋을 때는 일상의 봇짐이 더 무겁게 느껴져 감정이 더 예민하다고 느낄 때도 있다. 뭔가 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경우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몸이 안 좋을 때 가끔 감정이 더 둔해진다고 느낄 때도 있다. 최근 독감에 걸린 이후 후두염이 후유증으로 남았다. 조금만 말을 해도 기침을 계속하고 누워서 숨 쉴 때 가끔은 색색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건조한 방이 비염을 악화시키는데 평소라면 이런 날은 고달프다는 생각이 간간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 며칠간은 음악을 들어도 별다른 멜랑콜리가 없고 늦은 밤 시간도 그저 객관적 고독의 조각일 뿐 마음을 어딘가 노스탤직 한 곳으로 데려가지 않는다. 스스로를 무감각하게 관조하는 느낌이 든다. 득도한 걸까? 아니면 너무 지쳐서 익숙해진 걸까? 그럴리는 없다. 혐의를 최근 내내 먹고 있는 타이레놀 탓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기억을 더듬어서 찾아보자니 기존의 연구(Durso GR et al.,2015)에 따르면 아세트아미노펜이 신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심리적 자극에 대한 반응도 둔화시킨다. 아세트아미노펜을 먹으면 즐거운 자극이든 괴로운 자극이든 해당 자극을 감정적으로 덜 자극적인 것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발견 됐는데, 일시적이나마 타이레놀이 개인의 감정적 둔화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시사하는 측면이 있다. 조금 부연하자면 감정적 반응의 진폭을 줄여주는 형태의 효과가 있다고 이해할 수 있겠다.


타이레놀이 뇌의 섬엽의 기능을 약화시킨다는 연구도 있다(DeWall et al., 2010). 좀 거친 표현이기는 하지만 뇌섬엽은 감각과 감정 판단과 같은 의식을 연결하는 부위라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아세트아미노펜 복용이 공감(empathy) 기능을 약화시킨다는 연구(Dominik et al., 2019)도 있다.

간이 잘 버텨주는 한도 내에서는 타이레놀이 감정에 주석을 달아버릇하는 인생론적 의미 부여 기전과 그 습관변경하는 셈이다.


나는 오늘도 타이레놀 일일 최대 허용량 3,900mg 정도를 다 맞춰 먹었다. 이 정도면 잠깐 동안 현대사회의 소시오패스로 당당히 살아갈 채비가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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