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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물선 May 23. 2024

고마에/잇시키 마코토

시인이라면 방관자여도 좋다. 그 대신 항상 눈을 뜨고 있어야 한다.    

 

슈쿠가와라의 댐에는 네 어머니의 석상이 백 개고 천 개고 즐비한데 자신의 손발을 잡아당겨 갈가리 찢으며 진종일 입을 놀린다. 너에게 잔소리를 하는 걸까 아니면 너를 머리부터 물어뜯으려는 걸까. 그 모습이 보기 싫어도 꾹 참고 바라보아라.     


비 내리는 아침은 고마에 고분군(群)을 산책해도 좋다. 등나무 고분, 거북이 고분, 투구 고분. 어쩐 일인지 죽은 물고기의 배처럼 땅이 말랑말랑해서 다마가와 강에 가까워질수록 걷기가 힘들다. 어이쿠, 안내표지판을 믿으면 안 되지. 현재 위치라고 표시된 지점은 언제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장소’니까.     


노가와 강으로 가는 길에 네노곤겐에서 너는 결국 토했다. 네 속에서 나온 것을 보아라. 네가 이제 두 번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고 여긴 ‘잃어버린 너’가 아니더냐. 이런, 너의 모습이 안 보인다. 이상하군. 이번에는 네가 ‘잃어버린 너’가 되어버렸다.     


조심해라. 이와토가와 강 쪽부터 세상은 괴멸해 간다. 보아라, 너는 저 까마귀가 어디로 갔다고 생각하는가. 저 까마귀는 너의 이름을 불렀다. 너의 실제 이름을. 조금 전이었는데 다시 시야에서 사라졌다.     


자, 조금 더 눈을 크게 떠라. 커다란 오류가 너와 나를 별개의 장소로 격리하고 있으니. 이 대교를 건너면 너도 나처럼 영원히 눈을 뜨고 바라볼 수 있는데. 방관자인 채로 있을 수 있는데.     


내가 보기에 너는 아직 절망을 충분히 겪지 못했다. 맥주는 잔의 반 이상 마시지 마라. 그것이 일생에 걸쳐 시인이 받는 유일한 보수라 할지라도.     




잇시키 마코토의 시 <고마에>는 화자가 바라보고 경험하는 풍경을 주관화된 진술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이 시의 포괄적 진술은 첫 연에 드러나 있다. 이 시에서 중요한 맥락 중 하나는 후술 하겠지만 발화자와 발화의 대상자가 과연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나’라는 발화자가 존재하며 ‘너’라고 하는 발화 대상이 시에서 드러나는데, ‘나’는 어떤 의미 시적 주체이자 시적 발화자로서의 ‘나’이며, ‘너’는 시 내부 배경의 시적 현실의 지층의 자아인 것이다. 둘은 동일 인격의 다른 시적 층위의 겹쳐진 존재이다. ‘나’는 ‘너’에게 말을 거는 중이다. 그리고 이 시는 명백히 스스로를 ‘나’와 ‘너’의 겹눈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시인에게 주어진 숙명이자 태도임을 드러내는 시라 할 수 있다.


첫 연에서 시인이라면 ‘방관자여도 좋다’ 고 이야기한다. 그렇다. 시인은 행위하거나 변화시키는 자, 운동하는 자, 작동하거나 작동시키는 자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대신 항상 눈을 뜨고 있어야’하는 존재이다. 여기에는 허용의 뉘앙스가 묻은 진술이 먼저 제시되지만, 이제 그에 대한 가혹한 책무가 부여된다. 시인이란 눈을 뜨고 있어야 하지만, 그것도 ‘항상’ 눈을 뜨고 있어야 한다. 아니 항상 눈을 뜨고 있어야 한다니 말이 되는가? 너무 가혹한 일인데... 그런데, 항상 눈을 뜨고 있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두 번째 연은 슈쿠가와라 댐의 풍경을 주관화하여 진술하고 있다. ‘슈쿠가와라의 댐’에서 ‘어머니의 석상’이 ‘손발을 잡아당겨 갈가리 찢으며’ ‘입을 놀리는’ 장면을 본다. 댐이 지니고 있는 비생명, 물질, 단단함, 엄격함, 고정성, 완고함의 기호적 파장과 ‘강’이 지닌 흐름, 소란함, 파격, 충돌의 이미지적 파장이 대비되며, 이것을 수없이 많은 ‘어머니의 석상‘으로 시어로 구성해 이미지를 감각화하였다. 그리고 댐에서 쏟아지는 물의 모습과 소리는 재현적이면서도 개인적인 정서의 전이를 자연스럽게 이끌어낸다. ’ 손발을 찢으며 입을 놀리는 요란한 소리‘와 ’ 너‘에게 마치 잔소리를 하거나 마치 물어뜯으려는 듯 덮쳐오는 듯한 주관적 감각의 연합이 매우 강렬하다. 이에 대해 ’나‘는 ’ 싫어도 꾹 참고 바라보아라 ‘하고 이야기한다. 이것이 ’항상‘ 눈을 떠야 하는 맥락의 하나이다. 눈을 뜨고 싶지 않은 풍경들에 눈을 떠야 한다는 것.


세 번째 연은 고군분을 산책하는 풍경을 그리고 있다. 비 내리는 아침 등나무, 거북이, 투구 고분을 산책하는 상황이다. 등나무나 거북이, 투구와 같은 시어의 이미지는 모두 무덤의 이미지와 재현적으로도 비재현적으로도 잘 연결되어 해당 정경의 이미지를 잘 형상화하는데,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이 상황에서 비에 젖은 땅은 ’ 죽은 물고기의 배‘처럼 불룩하면서도 물컹물컹한, 불안정하고, 죽음의 이미지와도 잘 연결된, 고생스러운 낯선 현실의 지층을 벗어나기 시작하는 산책길이다. 여기서 화자는 ’ 어이 쿠 ‘라는 감탄사를 활용하며 ’ 걷기가 힘들다 ‘의 감각을 언어적 발화 기법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어가며 ’ 안내표지판을 믿으면 안 된다 ‘는 다소 뜬금없는 맥락의 문장을 잇고 있다. 지금 있는 곳은 안내표지판에 기입된 실제의 현실적 지층의 위치가 아닌 곳이라는 것이다. ’ 너‘는 사실 ’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장소‘에 지금 존재하고 있다는 인식을 비가 와서 물렁물렁해진 무덤의 땅(현실적 지층의 세계를 벗어나는 세계로 들어가는 분위기를 먼저 환기)하고 여기서 언어적 도약(어이쿠)을 통해 능청스럽게도 ’나‘는 ’ 너‘에게 여기가 네가 아는 그곳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언술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자연스럽게도 눈을 더 크게 떠야 한다는 생략된 진술을 짐작케 한다. ’현재 위치라고 표시된 지점은 언제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장소’니까 ‘라는 언술은 물론 ’현재‘라고 하는 이 순간, 현재성이란 고정될 수 없는 것, 현재성이자 실존은 고정된 좌표계에서 포착되지 않는 것이며, 그 ’ 위치‘라고 하는 것은 그저 지금 이동하는 주체에게 속해있는 것일 뿐이라는 함의일 터이다. 그 위치를 파악하는 것은, 표지판을 통한 것이 아니라 지금 ’ 너‘가 해야만 하는 일, 물렁물렁한 바닥을 감각하며 걷는 일인 것이다.


네 번째 연에서는 노가와 강으로 가는 길, 네노곤겐에서 결국 ’ 너‘가 토한 정황이다. ’ 너‘가 토한 것은 ’ 잃어버린 너‘이다. 그것도 단순히 ’ 잃어버린 너‘가 아니라 ’ 주워 담을 수 없다고 여긴 잃어버린 너‘인 것이다. 이 ’ 주워 담을 수 없다고 ‘ 여겼다는 것은 흘렸거나 버렸거나 바닥에 분실했거나, 아니면 이번과 같이 토해버렸거나 그런 상황을 ’ 너‘는 과거의 언젠가 경험했음을, 그리고 그로 인해 자신의 무엇인가를 잃어버렸음을 ’나‘는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 지금 앞선 연들의 ’항상 눈을 뜨는 ‘ 상황 속에서, 그로 인해 ’ 결국 토했다 ‘는 귀결의 상황 속에서 드러난 것은 ’ 잃어버린 너‘, 잃어버린 줄 알았던 너인 것이다. 여기서 강제적으로 ’ 너‘는 눈을 뜨고 여기까지 옴으로써 ’ 잃어버린 줄 알았던 너‘를 보게 된다. 그러나 ’ 너‘도 ’나‘에게 ’ 잃어버린 너‘이다. 어째서냐, 구토로 확인된 ’ 잃어버린 너‘가 ’ 너‘의 의식으로 소급될 때, ’ 너‘는 ’나‘에게로 소급되며, ’ 너‘ 또한 타자화된 ’나‘인 것이다. 이는 무한한 소급이다. 이는 자아의 문제인데, 자아란, OS에 불과하다. 다만, 이 자아는 자기 반영적 OS를 무수히 켜 무한히 소급하는 소프트웨어인 것이다. 다만, 이를 지속적으로 작동시킬 경우, 일종의 무한한 전력의 소모나 램의 소모가 발생할 터이므로, 특정 수준 이하, 특정 수준 이상의 메타-자아 인식 수준에서는 idle 모드를 형성할 따름일 것이다. 결국 이는 자아란 절대적 주관이 아니며, 이는 결국 ’ 잃어버린 너‘라는 타자화 될 수 있는 것이란 것. 즉, 지금 ’나‘도 ’ 잃어버린 너‘가 될 수 있는 것이란 인식을 보이고 있는 지점이다. 이는 바로 자아를 보는 겹눈을 의미한다. ’나‘는 언제까지나 ’나‘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다섯 번째 연에서 ’나‘는 ’ 너‘에게 ’ 조심해라 ‘고 이야기한다. ’이와토가와 강 쪽부터 세상은 괴멸해 간다 ‘고. 이미 이 시의 앞부분에서 시적 세계는 현실의 지층에서 어긋나 있기 때문에, 이와토가와 강 쪽부터 세계가 괴멸해 간다고 하여도 그것은 부조리한 진술로 읽히지 않는다. 그것은 시적으로 내적 인과가 획득되어 있는 상태이다. 즉 시적 세계관이 형성되어 있는 상태인 것이다. 다시 돌아와서 ’나‘의 이러한 경고는 무슨 뜻인가. 그것은 이와토가와 강 쪽이라는 지점으로부터 인식의 범위가 소멸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에 대해 ’ 너‘의 인식을 환기시키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에 대한 구체적인 시선을 던진다. ’ 보아라 ‘ 그렇다. 지금까지 계속 보고, 눈을 항상 뜨고 있는 태도와 상태에 대해 이야기를 해오고 있었다. 이제 ’나‘는 ’ 까마귀‘가 ’ 어디로‘갔는지 묻는다. 분명히 저 까마귀는 ’ 너‘의 실제 이름을 불렀는데, 바로 조금 전에, 그런데 다시 시야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세계는 괴멸하고 있는 중이다. 그것은 내 인식 범위의 괴멸이자 자아, 주체의 괴멸을 의미한다. 그곳에 까마귀가 있었다. 그리고 그 까마귀는 ’ 너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도 ’ 너의 실제 이름을‘ 까마귀는 불렀을 리가 없다. 그것은 ’ 내‘가 불렀다고 들은 것이다. 인식, 관념이 사라져 가는 곳에서 ’ 실제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 존재‘의 호명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나‘를 불러냈다는 것이다. 그것은 ’ 실제 이름‘이 된다. 누가 붙여준 기호로써의 ’ 이름‘이 아니라 스스로가 존재를 감각하는 매개로써의 ’ 이름‘으로 작동하는 호명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순간은 찰나에 불과하다는 것(’조금 전이었는데 다시 시야에서 사라졌다.‘) 눈을 항상 뜬다는 것은 이러한 순간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섯 번째 연에서는 ’나‘와 ’ 너‘의 간극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 커다란 오류가‘ ’ 별개의 장소로 격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 대교‘만 건너면 ’ 너‘는 ’나‘처럼 영원히 눈을 뜨고, 방관차인 채로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한가? 그렇지 않다. 그러한 합일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 커다란 오류‘로 인해 발생된 ’ 별개의 장소‘ 온전히 ’ 별개의 장소‘에 속한 ’두 자아‘이다. ’~있는데 ‘라는 종결 어미는, 그것이 불가능함을 시사한다. 이것은 시인, 시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의 합일 불가능함, 그 정-반의 구조를 시사하며, 반동적 자아로서의 시적 자아의 숙명을 드러내는 연이라 할 수 있다.


일곱 번째 연의 서술은 무척 아름답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슬픔과 시인의 숙명을 담지하고 있다. 이 마지막 연은 첫 연의 진술로부터 구조적으로 벗어난 연이다. ’ 내가 보기에 너는 아직 절망을 충분히 겪지 못했다 ‘라는 진술과 ’ 맥주는 잔의 반 이상 마시지 마라 ‘라는 시구는 짝지어 서 있다. 앞서 시적 주체는 지속적으로 ’항상 눈을 뜨고 있어야 한다 ‘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 지층의 원리로부터 벗어난 눈뜸을 의미한다. 그것은 정서의, 실존의, 인식의, 주체의, 자아의 반동적 눈이다. 완성이나 깨달음이 아니라 끝없는 반동의 고리이며 순환적 눈뜸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 눈뜨고 있음‘은 고정적인 ’ 눈뜨고 있음‘이 아니라 변증법적 ‘눈뜨고 있음’의 상태이다. 시인의 정서에 대한 인지는 고정적이어서는 안 된다, 외로움이든, 슬픔이든, 그 감정 자체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그 감정에 대한 반동으로 시인의 감정에 대한 인식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맥주의 잔은 가득 차 있어서도, 맥주는 반 이상 마셔서도 안된다.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있는 진동하는 가능성의 절반의 맥주잔이 바로 시인의 눈이 보는 것이며, 그것이 시인의 눈에 비치는 세계이다. 세계는 고정되어 있을 수 없으며, 그것이 세계를 보는 자이자 ‘스스로를 보는 자’ 로서 시인이 눈을 뜨고 보며 얻는 유일한 보수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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