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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물선 Dec 06. 2023

영양제만 주시오

85세 영감님 한 분이 외래로 들어온다. 너무 기력이 없고 깔아진다고. 딱 봐도 상태가 외래에서 진료를 받을 컨디션은 아니었다. 걸어서 들어온 게 용하다 싶은 느낌이다. 급하게 의자를 빼서 챙겨 앉히며 물으니 본인이 지난 수십여 일 간 스트레스가 너무 많았다고 한다. 동네 병원에서 영양 주사를 맞으면서 근근이 버텼는데 이제 그것도 잘 안 들어서 큰 병원 치료받으러 왔다고.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어 혈액검사를 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이런저런 검사 결과가 다 좋지 않았지만 혈중 칼슘 농도가 16.4mg/dL 가 나왔다. 멀쩡하게 걷는 것도 신기할 노릇이다. 사실 환자라기보다는 환자일 수도 있는 개념이라고 해도 이해할 지경이다.

응급실로 가셔야 된다고 안내해 드린다고 안 들리는 귀에 몇 번 소리를 질러 본다. 손을 붙잡고 진료 의자에서 일으켜 응급실로 이끌고 가려고 해도 난 그냥 영양제랑 약만 타가겠다고 큰 소리를 치면서 거부를 거부를 하는데... 도대체 인간의 자율성이고 자유의지를 어디까지 존중해야 하는지 현장에선 지리멸렬해진다.

도저히 이대론 해결이 날 것 같지가 않다. 결국 영감님 폴더폰을 검열하듯이 단축키나 문자 메시지를 하나하나 눌러가며 확인해 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단축 번호 1번에 저장된 둘째 아들이랑 연락이 닿았다. 둘째 아들은 지금 근무 중이니 전화를 못 받는다고 바로 전화를 끊어버린다. 결국에는 딴 집에서 살고 있다고 하는 큰 아들이 삼십 분쯤 있다가 보호자로 외래로 찾아왔다. 큰 아들은 0번에 저장되어 있었다. 그래도 좀 젊은 자녀가 찾아와서 대화가 될듯해 영감님 상태를 큰 아들에게 자세히 설명 했다. 돌아가실 수도 있으니 정말 주의를 해야 한다. 간단한 상태가 아니다. 영양제로 넘어갈 상태가 아니라니까요?

큰 아들은 별 질문도 없이 응급실로 가셔야 한다는 말에 아버지를 모시고 알겠다며 무심히 응급실로 가버렸다. 희한하게도 영감님이 아들이 이끄는 팔에는 거부의 몸짓 하나 없이 그냥 이끌려서 점점이 걸어가더라는 말이다.

오후 진료를 보면서 영감님이 응급실에서 어떻게 되셨나 살펴보니 다행히 입원 오더가 나왔다. 이제 급한 고칼슘혈증 문제를 교정하면서 원인질환이 폐암인지 신부전인지 부갑상선 문제인지 아니면 먹던 약과 관련된 문제인지 파악하기 위해 이런저런 검사를 하기도 할 터이다. 어찌 되었든 아마 지금 당장의 고칼슘혈증의 문제는 해결이 될 터이다. 될 터인데...

영감님은 앞으로 겪어야 할 지난한 모든 과정과 수속의 단계로부터 내려오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길고 긴 검사와 입원 과정, 수많은 동의서들. 의사인 내가 보기에도 앞으로 펼쳐질 그 모든 과정이 무상한 삶에 대한 파산 수속을 밟아가는 지난한 과정일 것으로 예감된다. 영양제랑 약만 타가겠다는 환자의 완강했던 첫 번째 요구는 그런 예감으로부터 비롯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파산 수속의 과정은 또 다른 형태로 관계를 자극하고 사그라트릴 것이다.

0번과 1번 사이에서 말을 잃고 매달려 있던 영감님의 모습은 애처로우면서도 아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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