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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연재 Apr 10. 2022

간판의 이유

날 보러 와요

나이가 드니 여기저기가 탈이 난다. 아들놈이 야구를 좋아해서 캐치볼을 해 주었는데, 세게 던져 주려고 용을 쓰다 보니 오른쪽 날갯죽지 부분이 덜컥했다. 생활에는 큰 불편이 없어서 그럭저럭 참았는데, 몸이 안 좋거나 약간 운동을 할라치면 불편한 통증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격렬한 야외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대략 1년간을 유야무야 묵혀 두다가 관절 전문 병원을 찾아 MRI를 찍고 진단을 받았다. 태어나서 MRI 기계 안은 처음 들어가 보았다. 온갖 기계음이 나를 알고 싶다고 다가오는데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오른쪽 어깨 인대가 손상됐고 염증도 많이 끼였다고 의사는 진단했다. 나이 들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말도 덧붙이면서. 진료 후에 염증 치료를 위해 오른쪽 어깨에 주사를 놓았다. 스테로이드계 소염제가 들어간 약도 1주일 처방받았다. 주사 맞고 하루 처방해 준 약을 먹으니 기분 탓인지 좀 나아진 듯도 하다. 꼭 나을 거라는 믿음보다, 늘 뻐근하던 어깨의 속사정을 바로 알게 되어 속 시원하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해졌다


이른 아침에 병원에 들른 터라 아침밥을 먹으려 주변 식당을 찾다가, 문득 병원 주변 유흥가에 밀집한 건물들의 벽면을 빼곡히 메운 간판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 법무사, 피부과, 치과, 헤어살롱, GYM, 미인 클럽, 마사지 등 업종도 이름도 다양한 각양각색의 간판들.  저렇게 자신의 간판을 내 걸고 있는 사업장의 주인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늘 당연스럽게 지나가던 명동, 강남 복잡한 거리 풍경이 내게 질문했다.  


오사카 도톤보리


전체로 거리를 보면, 지나가는 사람에게 복잡한 거리는 그저 풍경일 뿐이다. 하지만 각각의 간판은 저마다의 사연으로 외치고 있는 것이다. '나 이런 사람이니까 나를 보러 오세요.'라는.  오사카의 도톤보리만 봐도 클리코상은 기억이 나도 나머지는 글쎄다.  


예전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 교수님으로부터 글 하나를 소개받은 적이 있다. 아마도 새롭게 공부를 하는 거니 마음을 다 잡기 바란 뜻에서 알려 주신 듯하다. 중용 23장인데, 현빈과 정재영이 열연한 영화 '역린'에서도 이 중용 문장을 사용한 부분이 있다. 정재영 씨가 한글로 옮긴 해석은 아래와 같다. (아래 이미지 참조)


중용 23장(영화 역린)


독서백편 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라는 말도 있듯이 나는 뜻을 새겨 암송하기 좋아한다. 중용 23장의 원문과 해석을 책상 앞 벽에 걸어 놓고 매일 되뇌었다. 외우다 보면 뜻이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정성을 다하면 누가 뭐라고 하던 노력하지 않아도 몸에 배고, 그것이 또 겉으로 드러나게 되며, 만약 드러난 그것이 밝다면 세상을 감동시키고 바꾼다. 대략적인 내 해석은 이렇다.  


몇 년간 중용 23장을 되씹으면서 살았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중용 23장에서는 몇 개의 스텝(step)으로 발전하는 단계를 말하는데, 실상은 한 스텝도 나가기가 어려웠다. 이러니 세상을 바꾼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얘기는 아닌지? 늘 초라한 자신을 발견할 뿐이었다. 


자신을 알리고 포장하기 위한 간판에 모두 열심이다. 몇 년 전에 대학에서 강의한 적이 있다. 학생들은 학점에 민감했고, 특히 로스쿨과 같은 상위 전문 대학원 진학을 염두하고 있는 학생들은 눈물로 호소할 정도로 치열했다. 우리 회사 입사 채용을 할 때도 당연히 학교 스펙을 참고를 한다. 하지만 학교만으로, 자격증만으로 분명 놓칠 수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학교라면 입사지원자가 제출한 포트폴리오(portfolio)를 최대한 참고하려고 시간을 내서 본다. 포트폴리오에는 스펙에서 드러나지 않는 지원자의 주요 관심사와 향후 조직에 적응할 때의 대략적인 방향성이 가늠되기 때문이다. 


벽면을 가득 메운 형형색색의 간판들. 완벽하리만큼 촘촘히 메운 입사 지원자의 스펙. "모두들 나를 알아 봐 주세요"라고 대놓고 외친다. 최근에는 국제화가 되면서 해외 학위자들도 많이 회사에 지원한다. 예전에는 안 그랬겠지만, 폄훼하는 건 아니지만, 입사 후 해외 학위자가 국내 학위자보다 퍼포먼스가 좋다고 말하기 어렵다. 간판의 프리미엄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앞서 어깨 인대 손상에 대해 이야기한 것처럼 몸속의 병도 다 때가 되면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다 자신을 드러낸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며 시공간을 살아가야 한다. 


회사를 공동 창업하고 오는 6월이면 4년째가 된다. 내가 회사를 세울 때 한마디로 정의했던 회사의 사명 선언문(mission statement)이다. "We, AIthe, Make things intelligent using machine learning" (우리 에이아이더는 기계학습을 이용해서 사물을 똑똑하게 만듭니다.)  창업한 회사의 비전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www.aithe.io)


벌어서 회사 운영에 필요한 비용 처리에 급급할 때는 몰랐고 별다르게 신경 쓰지도 않았다. 하지만, 영업이익이 나기 시작하고 회사가 성장하면서부터는 내가 간판으로 설정한 저 사명 선언문에 내게 질문을 한다. '어이, 얼마나 당신의 사명 선언문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거야?' 조직이 커지면서 하나하나 신경 쓰기 더 어려워지는 요즘에는, 대략 100명의 조직 구성원들 각각에게 저 사명 선언문은 어떤 것일까? 궁금하다. 게다가 2020년 12월에는 바이오기업과 합병하면서 회사의 간판은 분명히 다르게 변해가고 있다


호호야, 


어떤 사람은 자신의 간판이 무엇인지 모르고,

또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 간판을 달고 살고,

또 어떤 사람은 아예 가면으로 산단다.  


간판을 달면 누군가가 너를 보러 올 거야. 자신을 알리기 위한 간판이 역할을 하는 거지. 아마 살면서 자신의 간판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면 부지기수로 바꿔 달기도 해야 할 거야. 때론 주변 사람이 먼저 알아서 지적하기도 하고, 또 찾아와서 벗겨 주기도 할 거고. 그때는 주저 없이 새로운 간판을 찾아야 해. 그럼 새로운 누군가가 또 너를 보러 올 거야. 늘 새로운 자신에게 맞는 간판을 찾는 여정을 하는 거지. 때 되면 밥을 먹는 것처럼 말이야. 


p.s. 오늘 정찬성 선수의 UFC 세계 타이틀 전이 있었다. 내심 정 선수의 전략이 먹혀 우승하기를 바랬다. 의외는 없었다. 챔피언 볼카노프스키 선수는 너무 강했다. 정 선수가 고전하는 경기를 보며 내내 마음이 아팠다. 챔피언에 힘이 부쳤고, 경기 시간이 지나면서 매끈한 신사의 정 선수의 얼굴은 피투성이 상처로 일그러졌다. 


탄천변 벚꽃


경기가 끝나고 정찬성 선수는 인터뷰에서 넘을 수 없는 벽을 느꼈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이 알다시피 정찬성 선수의 닉네임은 '코리안 좀비'다. 비록 세계 챔피언은 되지 못했지만, 나는 오늘 경기가 정찬성 선수가 코리안 좀비라는 자신의 간판(닉네임)으로 격투가로서의 가장 아름다운 본색(本色)을 보여 주었다는 생각이다. 인터뷰 말미에 사회자가 다시 물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정찬성 선수가 말했다. "시합에서 항상 지면 그렇지만, 언제든 그만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시간이 조금 더 지나 보면 알겠지만..." "나는 더 이상 챔피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어요. 제가 이것을 계속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벚꽃이 한창이다. 아내와 산책 길에 한 장 찍었다. 정찬성 선수, 당신은 오늘의 벚꽃처럼 찬란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조심스럽게 정찬성 선수가 만들어 낼 새로운 간판을 응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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