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작용하는가
이들에게 질투가 작용하는 방법은 아주 특이하다. 나르시시스트에게 있어 질투는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이며, 그들이 이것을 수용하고 인정하는 순간 그들 자신은 나약하고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는 극한의 두려움에 휩싸인다. 외현적 나르시시스트 경우 이들이 느끼고 인정할 수 있는 부정적인 감정의 스펙트럼은 아주 좁다. 거의 분노가 대부분인데 이는 표현했을 때 자신이 나약해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지 않는 유일한 감정이기도 하다. 내현적 나르시시스트는 후천적으로 받은 학대와 같은 것들도 꽤나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사회적 고립, 절망과 같은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내현적 나르시시스트 아래 나고 자란 내 관점에선, 질투에 있어서는 외현적이나 내현적 둘 다 비슷한 행동 패턴을 보인다.
나르시시스트들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다 초월했거나 능수능란하게 관리를 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이런 감정이 올라오더라도 정말 잘 눌러서 억제를 시킨다. 질투 또한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질투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그리고 필사적으로 부정하기 때문에 이들은 정말 감쪽같이 자신을 속인다. 하지만 감정은 부정하고 담아 둔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이 느끼는 질투는 타인에게 뒤집어 씌워서 해소를 하는데 이를 프로젝션 (projection, 투영)이라고 한다. 보통 이들이 주변인들에게 '너는 샘이 많아', '너 내가 많이 부러워서 그런 거지?'라고 은연중에 꼬투리 잡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결국 그들 본인 안에 질투심이 올라온다는 사인이다. 이런 공격적인 모습을 마치 사람들을 견제하려고 고도의 두뇌를 굴려서 계산한 것이 아니냐 할지도 모르는데 되리어 제일 원시적인 방어기제이다.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인간스러운 내 모습은 삭제해버리는 지극히 일차원적인 태도이다. 감정이 올라오면 그냥 반사적으로 나오는 행동으로 이해하는 게 좋다.
그들에게 타인은 먹잇감이며 서플라이이다. 이것인즉슨, 그들은 남의 이미지를 그들만의 방식으로 재단하고 왜곡하고 그걸 소비함으로써 자신이 그렇게 나약한 사람이 아니라는 일종의 정신승리를 하며 그 우월감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것이다. 살면서 매일 남들에게 칭찬만 받고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으면서 살아갈 수 없다. 이런 상황의 지속을 갈구하고 살면 매일 원하는 만큼의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니 하루하루가 절망적일 것이다. 애초에 나르시시스트들은 단순히 칭찬이나 인스타그램에서 라이크를 구걸하는 식으로 밑바닥인 자기의 자존감을 채우질 않는다. 이들은 남을 비방하고 헐뜯고 모멸감을 주며 남이 자신보다 잘났을 경우 자신과 동일시하는 식 등으로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하단 착각을 키워 나가고 그걸로 자기애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그들은 이상적인 자화상, 하지만 모호한 신적인 이미지를 생후 1-2년 내지 이내에 만들어 내는데(제임스 마스터슨) 이 이미지를 바로 나 자신이라고 믿는 것이 평생 그들이 살아가는 목적이자 이유 아닐까 싶다. 이 절대자의 이미지를 위협하는 것이 바로 무엇이냐면 타인이 나보다 잘 나고 인정받을 때이다. 나르시시스트에게 있어서 질투를 하게 되는 상황은 자신의 삶의 이유인 절대자의 이미지가 망가질 수 있는 위기의 상황인 것이다.
질투라는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감지하고 반사적으로 사람을 헐뜯어서 그 감정을 제어하려 할 때 그들이 내뱉는 비난과 조롱은 말이 안 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표정이나 몸짓이 추하다면서 내려 까는 것이 제일 대표적이고 남이 웃을 땐 헤프다, 우는 모습을 보이면 나약하다, 분노하는 모습을 보이면 추하고, 참을성을 보여주면 겁쟁이라고 비난한다. 내가 전혀 아닌데도 나를 보고 이런 사람이라고 특정 지어 비난하는 것, 이런 상황이 밀접한 관계에서 지속되는것이 바로 가스 라이팅이다. 차가운 이성으로 바라보면 이게 얼마나 허점 투성이에 멍청한 비난인지 잘 알게 될 것이다. 이게 계산된 행동이 아닌 것은 이 엉성함에서 다 드러난다.
나르시시스트들은 대화를 하면서 한 번도 자신이 무얼 했고 어떤 감정을 느꼈다는, 자신의 삶과 일상을 되돌아보는 이야기는 하지도 않을뿐더러 잘하지 못한다. 자신이 무엇을 했단 얘기 끝에도 항상 타인을 엉뚱하게 끌어들여 대화의 흐름을 뜬금없게 만들기도 한다. 이는 자신에 대한 성찰이 불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냥 살면서 이들은 타인의 불행과 단점 찾기만 가능한 그런 안경을 쓰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 이렇게 '자기애'에 취한 이들이지만 이들의 눈은 항상 타인을 쫒고 타인 위주로 살아가고 있다.
많은 나르시시스트들이 외향성을 띌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점에 있다. 바깥에 나가야지 그들의 정서적 서플라이를 찾을 것이 아닌가. 이들도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정서적 에너지를 충전한다.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교감을 하면서 충전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에게 타인은 사물이자 도구일 뿐이니까. 자신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비즈니스 파티, 자선행사, 종교행사 등을 단순히 허영심이나 우월감만을 느끼기 위해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이런 곳을 다녀오면 거기서 본 사람들의 기행이나 단점들을 안주거리 삼아 몇 달에서 심하게는 몇 년을 계속 씹고 그렇게 살아간다. 그렇게 소가 여물을 2차 소화하듯 그렇게 한달까.
이들이 자신의 자존감을 채우기 위해 상대방을 헐뜯는 것 이외에도 다른 잘난 사람과 동일시하는 예도 있다. 이는 공격적인 행위는 아니지만 이런 걸로 인해서 장기적으로는 나르시시스트에게 얽혀서 농락당하기 쉽다.
한 예를 들자면 나르시시스트는 자기가 키우지도 않은 조카나 사돈의 자식이 그렇게 성적이 우수하고 대단한 직장에 다닌다고 떠들고 다닌다. 칭찬을 받는 입장에서는 이게 긍정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칭찬으로 착각해선 안 된다. 이들은 타인에게 진심 어린 칭찬 자체를 못한다. 위에 나온 '신적인 이미지에 대한 위협'을 보면 이들 주변에는 칭찬받을 만한 사람이 아예 없어야 한다.
이들이 남에게 칭찬처럼 하는 말은 사실 '내가 이렇게 잘 났기에 주변에 이렇게 잘난 사람들이 몰리는 것.' 이란 뜻이 함축되어 있다. 월등한 사람들이 가까이 있으니 나 또한 그들과 말을 섞을만한 대단한 언변의 소유가에, 한 번만 말해도 다 알아듣고 기억하는 월등한 두뇌를 가진 그런 엘리트라고 돌려서 말하고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