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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개 Jan 03. 2022

정서적으로 미숙한 엄마가 자식에게 씌우는 굴레

https://www.82cook.com/entiz/read.php?bn=15&num=3361236&page=21 

철이 들면서부터 일만 있으면 자기 손가락을 펴서 짚어가면서 엄마가 한 말
“다섯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
그 말을 (그녀가) 늙어 노쇠해서 흙으로 돌아간 뒤에서야,
내 나이 70 가까워서야
가장 큰 편애의 표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깨물어 아픈 손가락 따로 있고  
마음을 다친 상처로 피 흘리는 손가락을 보면서
깨물어 아픈 손가락을 위로해주라고 잔소리 잔소리하던 엄마!

그 잔소리의 근본을 70이 가까워서야 알게 된 나
어디선가 누구에게나 하소연하고 싶은 아렸던 내 가슴속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딸로 알던 사람들에게 자존심 상할까 표현도 하지 못하고….
ㅡ 그러고 보니 (엄마는) 교활함도 가지고 있었네

(어머님) 운명하셨습니다 라는 말을 듣는 순간 제일 먼저 머릿속에 나타난 생각은
이제는 너를 (다른 형제) 편들 사람이 없구나.  

진작에 알았더라면  
하늘가기 조금 전에라도 알았더라면………

언젠가 말씀드렸지요? 하늘 가서도 기억하시나요?
우리 둘 다 다시 태어나자고 했던 말
“내가 엄마 되고, 엄마가 내 딸이 되어서 다시 태어나자. 엄마가 나한테 한만큼만 내 딸이 된 엄마한테 그대로 해 줄 것이니….”

인연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를 갈구하면서 여러 공부를 했건만 편애라는  
그 편애를 만들었던 (엄마라는) 주인공도 없는 지금.
나는 다시 운명의 굴레 속에 갇혀버렸구나.
나 스스로 그 굴레 속으로 걸어갔구나.   

게시판을 보다가 찾은 글에서 가슴을 관통하는 글을 읽었다. 나르시시스트를 비롯해 정서적으로 미성숙해 본인의 결함을 자녀에게 뒤집어 씌우는 행태가 얼마나 자녀에게 크나큰, 그리고 평생을 짊어지고 가야 할 거대한 굴레를 씌우는지 이 글이 정확히 짚어서 알려주고 있다.  


윗글에서 보인 엄마는 정확히 어떤 다양한 방면으로 어느 강도의 정서적 학대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자식 간에 그리고 가족 간에 차별대우와 이간질 등으로 한 자녀는 희생양(scapegoat)으로 삼아서 가정 안에서 독재자로서의 자리를 굳건히 다진 거 같다는 것이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르시시스트 부모 아래 자녀를 여럿 둔 가정에서 아주 흔히 볼 수 있는 패턴이다.  


특히 나르시시스트는 본인이 아닌 사람, 본인의 자녀들 조차도 자기와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고 일종의 도구나 사물로 본다. 여기서 자식을 두고 편애를 한다는 것은 가족 내에서 엄마인 자신의 위치를 굳건히 다지기 위해 하는 일종의 정치적 전략일 뿐이지 정말 이 나르시시스트 엄마가 어떤 자녀는 사랑을 하고 다른 자녀는 싫어하는 그런 구도가 전혀 아니다. 이들이 자식에게 가지는 긍정적 감정은 사랑이라고 하기엔 불완전하다. 왕따 주동자가 본인이 그룹 내에서 자신이 힘을 과시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키고자 한 아이를 타깃으로 삼아 따돌림을 주도하고 다른 아이들도 동참하게 만들어서 이런 세고 우월한 집단에 소속감을 느끼게 하는 그런 메커니즘이라고 보면 된다.  


지난달에 금쪽같은 내 새끼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엄마를 미워하는 아이가 나온 적이 있는데 엄마를 미워하게끔 부추긴 것은 시어머니와 그 아이의 아버지였다. 이런 식으로 가족 내에서 왕따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이유는 가족을 편 갈라놓아야 이 텐션 안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힐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자주 내뱉는 말은 '어떤 이도 내 맘대로 가지고 놀 수 있다’라는 말인데 가정 내에선 정말 유효한 말이다. 연약한 어린 손녀는 자신도 이것에 동조하지 않으면 엄마 꼴이 날것을 알기 때문에 생존 본능으로 주동자에게 붙어있게 된다. 이 손녀는 여느 왕따 가담자처럼 자신도 어찌 될지 모르는 위협적인 상황에서도 엄마를 상대로 가해를 하면서 본인이 살아 있어 안도감을 느끼는 괴상망측한 양가감정에 휩싸이는 것이다.  


그 어떤 가정에서도 가족이 물려 뜯겨 서서히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나는 저렇게 안 당해서 다행이다'라는 안도감을 느끼고 이 감정이 행복 대체하는 것이 되어선 안 된다. 가족이란 울타리가 약육강식의 사반나 초원이 되어 버리다니. 이렇게 추악하고 끔찍한 일이 더 있겠는가.  더 끔찍한 예로는 코리아나 호텔 방 씨 일가의 사례도 있다.


나르시시스트와 반사회성 인격장애는 이런 면에서 혼동하기가 쉽고 같은 클러스터 B 인격장애 선상에서 묶여서 분류된다. 나르시시즘-반사회적 인격장애- 마키아벨리즘 이 셋을 Dark Triad라고 한데 묶어서 설명하는 데는 이런 타인에 대한 공감력 결여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들이 가족 내에서 군림하는 방법은 큰 틀면에선 같지만 디테일 면에서 강도만 다를 뿐이다.  


엄마가 자녀들 사이에서 이런 식으로 편애를 하고 차별을 하는 것은 위에서 나온 왕따가 해에서 벌어지는 힘의 논리에서 나온다. 엄마는 상대적으로 예민한 아이 A를 정서적으로 학대를 하거나, 은근한 차별과 편애를 하는 방법으로 가정 내에서 아이를 고립시키고 더 나약하게 만든다. 아이 A는 거의 그로기 상태가 되는데 이때 보살펴주는 행동을 가끔씩 해서 아이로 하여금 사막 위에서 한 방울의 사랑이라도 받아먹으려고 몸부림치는 그런 상태로 만든다. 아이에 대한 통제가 너무 수월해지는 것이다.


아이 B는 아이 A를 이런 구렁텅이로 넣기 위한 일종의 도구로 사용한다. 아이 B 같은 경우는 기질 자체가 무던하고 엄마 같은 안하무인인 성격으로 바뀌기 아주 쉬운 케이스가 많다. 본인이 제일 동질감을 느끼는 아이 B를 자신의 아바타로 삼아서 아이 A를 따돌리는데 본격적으로 가담시키기도 한다.  


여기서 비극은 자녀 둘 다 엄마에게서 어떠한 양질의 감정적 교류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자라난다는 것이다. 둘 다 장기판 위에 말처럼 엄마에게 이용만 당하면서 그렇게 커가는 것이다.  


여기서만이 끝이 아니다. 엄마에게 노골적으로 정서적 학대에 노출된 아이는 안 그래도 예민한 기질을 가진 데다가 어려서부터 수천수만 번을 엄마에게 관심을 요구할 때마다 오히려 공격을 당하게 되는 이런 좌절의 반복을 엄마 본인이 살아 있는 한 계속 체험하게 된다.


정서적으로 미숙한 엄마는 본인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는지 전혀 자기 성찰을 할 줄 모르는 데다가 아이에게 그 탓을 돌리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윗글의 글쓴이가 이런 부분을 정확히 짚었다. 본인은 아무 잘못 없다며 되리어 딸인 네가 나의 마음을 어루만지라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고 있지 않는가? 글의 뉘앙스상 엄마는 자신이 편애하던 아이에게 상처를 받았는데 그것에 대한 위로를 차별당하던 글쓴이에게 요구를 한 거 같기도 하다.


가정 내에서 어떤 어른도 아이에게 이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알려줄 턱이 없다. 아빠 또한 같은 인격장애를 겪고 있다거나 엄마의 제어 아래 살아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러니 예민한 아이 A는 이 고통의 굴레를 본인의 결함 탓으로 돌리게 되어 바닥을 뚫고 내려가는 수준의 자존감을 가지게 된다. 게다가 언제 또 비난과 힐난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만성 불안에 시달린다거나, 아니면 좌절에 너무 익숙해진 탓인지 무기력을 동반한 우울에 잠식 되게 된다.  


윗글에서 나온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딸로 알던 사람들에게 자존심 상할까 표현도 하지 못하고…"라는 구절에서도 나오듯, 나르시스스트들, 특히나 내현적 나르시시스트는 외부에 '선하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집안에서 어떠한 말도 나오지 못하게 철저히 모두 입단속을 시키고 더 나아가 가정 자체를 폐쇄적으로 만드는데 엄청난 공을 들인다. 이렇게 이미지 메이킹을 철두철미 하게 하기 때문에 피해를 당하는 아이 입장에서는 실제로 바깥에 나가서 이 가정에서 일어나는 이런 엄청난 일을 얘기해도 신빙성을 입증하기가 여간 쉽지가 않을 것이다. 나는 나이 30 넘어서 이런 이야기들을 지인이나 블로그를 통해서 전파하긴 했지만 사실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라난 사람들은 어른이 된 내 말도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본인은 자존심 상할까 남들에게 표현도 하지 못한다는 것은 본인의 자존심 보단, 엄마가 평생 자신에게 했던 말을 내면화시킴으로써 엄마의 본심을 자신의 본심으로 착각하는 상황인 것이다. 이걸 echoing 에코 현상이라고 한다. 정서적 학대 피해자는 본인 내면의 목소리를 잘 판별하지 못한다. 부모의 악의 섞인 말들을 본인을 대표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으로 내면화시켜서 자신의 목소리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아마도 말을 쉽사리 꺼내지 못한다는 것은 윗처럼 1) 남들이 자신을 믿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과 2) 이 상황을 알리는 것은 엄마가 원치 않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것이 글쓴이 본인을 위한 일이라고 혼동을 하는 것이다.  


글쓴이의 엄마는 이제 세상에 없어 한 줌 흙이 되어 자연으로 돌아간다지만 글쓴이는 본인이 살아온 70년 동안 이미 그리고 남은 일생을 아래와 같은 문제에 시달리고 극복을 하기 위해 온갖 힘을 써야 한다. 글쓴이는 이를 편애의 굴레라 심플하게 칭했지만 나의 관점에서 이 굴레는 생각보다 더 구체적이고 디테일하며 어마어마하다. 정서적으로 미숙한, 나르시시스트 부모가 자녀에게 씌우는 이 무한한 굴레는 다음과 같다.   


갈대처럼 조그마한 바람에서 휘청거리는 흐릿한 자아

자기를 우선시하는 자기 존중의 부재

바닥을 뚫고 내려가는 자존감

(엄마와 같이) 세상이 자신을 외면하고 거부할 것 같은 계속되는 불안감

본인의 트라우마로 인해 일상에 지장을 받는 것

타인에게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미숙함

트리거로 인해 트라우마가 올라오거나 약간의 불편한 일을 겪더라도 이런 안 좋은 감정을 겪을 때마다 조절에 있어 큰 문제를 겪는 것

계속된 거절에 습득한 학습된 무기력


나 또한 대략 6년 전 이런 것들을 책으로 처음 접했을 때는 어떠한 스케일인지 짐작도 안 갔고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아닌가 싶어서 압도당하고 치료를 계속 진행해야 하나 비관한 적이 있다. 나르시시스트 엄마 아래 큰다는 것은 감정적 좌절의 연속일 뿐이다. 기억도 할 수 없는 뇌가 형성되고 있는 신생아 때부터 엄마가 보여주는 감정적 부재, 폭력성 같은 부정적인 영향을 받는다고 봐야 한다. 너무 어렸을 때부터 형성된 이 굴레이기 때문에 완치를 한다는 것은 환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속적인 치료와 정서적으로 안정된 환경으로 옮기는 노력을 통해서 인생의 전환점을 찾고 생각도 못한 방향으로 삶을 발전시키는 경우가 많다. 삶의 퀄리티가 극도로 올라가고 평생 느끼지 못했던 긍정적 감정들을 하나씩 습득해가는 것만으로도 완치에 버금가는 일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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