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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개 Dec 21. 2021

엄마가 딸을 질투할 수 있나요?

나르시시스트 엄마의 병리적 질투

엄마가 딸을 질투하는 건 비정상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아가페적 내리사랑은 사회적 통념으로 자리 잡아 하도 당연시되다 보니 교과서에서 조차 언급을 안 하죠. 되리어 자연과학 속 동물의 습성과 같이 엮여서 모성애나 부성애가 없으면 금수만도 못한 취급을 당합니다.

 

자녀에 대한 질투심을 가진 부모를 두게 되면 부모를 통해 인간의 최악의 모습을 보고 경험하게 되는 끔찍한 일을 겪게 됩니다. 정말 가족이 남 보다 더 못한, 위협적인 존재가 되는 거죠. ‘바깥세상에선 부모라면 다 자식에게 사랑만 준다는데, 우리 집은 좀 뭔가 께름찍해..’라는 이상한 감정을 겪으면서 자라나는 자녀는 긴 시간 동안 인지부조화를 겪게 되죠.


오히려 나르시시스트들은 피를 나눈 직계 가족에게 그 질투와 분노를 더 빈번하게 표출합니다. 자식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것이 왜 알려지지 않느냐? 가정이란 환경은 극도로 폐쇄적일 수 있습니다. 특히나 자기 체면치레에 온 에너지를 쏟아붓는 나르시시스트 부모에게 있어선 집은 철창 없는 감옥과 같죠. 자녀에게도 같은 이유로 철저히 입단속을 시킵니다.


나르시시스트라고 해서 맨날 때리고 폭언만 할까요? 가끔은 잘못도 안 한 애를 잡아 놓고서 훈계를 줄곧 한 다음 자기 맘이 수그러들면 ‘너 잘못했어 안 했어? 앞으로 조용히 말 잘 들을 거지?’ 하면서 친자식에게 ‘미운 놈 떡 하나 주기’를 시전 합니다. 이렇게 비행기를 태우다가 추락시키는 걸 idealisation - devaluation cycle이라고 하는데 나르시시스트나 경계선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상대방을 정서적으로 조종하는 방법이기도 하죠. 이런 조종을 십수 년 이상을 하게 되면 아이는 부모가 그래도 항상 나쁘지만은 않았다며 정서적 학대의 큰 그림을 보지 못하고 왜곡된 시선으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게 됩니다.

 

대부분 이런 환경에서 자녀는 자라나면서 뭔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일들이 많이 생깁니다. 엄마는 나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이라면서 궁핍한 처지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하루 두 끼 이상을 라면만 끓여 준다거나, 양치질을 제대로 가르쳐 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빨 하나 제대로 못 닦냐며 닦달을 한다거나, 어려선 엄마 닮아서 글자도 빨리 깨우친다며 즐거워하더니 고학년 올라가서 성적이 안 늘면 아빠를 닮아서 그렇다며 말을 바꾸는 등.. 이런 상황과 모순되는 모습을 많이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상식이라고 알고 있는 것에 아주 상반되는 걸 마주했을 때 심리적으로 불쾌감을 느낍니다. 이걸 인지 부조화라고 하죠. 그리고 불쾌함을 접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우리 사고는 이 불쾌감을 해소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그래서 왜 이렇게 모순적인 일이 발생했는지 스스로 이것에 대한 합당한 이유를 끼워 맞추려고 하는 거죠. 이런 환경에서 자녀들은 그 이유를 본인의 불온전함, 인간으로서의 부족함으로 돌리려고 합니다.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만 내가 부족해서 그만큼 눈에 보이는 사랑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 이런 것 말이죠.

 

사이비 단체에서 지구 종말론 날짜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멸망하지 않으면 신도들은 ‘우리의 간절한 기도가 닿아서 신이 그 노여움을 풀었구나.’라며 더 열렬히 기도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불쾌함을 피하고자 제멋대로 끼워 맞춘 답이 정답일 가능성은 이런 상황에선 없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엄마의 행동에서 모순을 발견한다는 것 자체 만으로도 생존의 위협이 됩니다. 내 생존을 책임지는 부모가 나를 질투하고 미워한다? 그건 언제든지 부모에게 버림받을 수 있다는 말과 동일하잖아요. 미성년자에게 그것만큼 공포스러운 자각이 어디 있겠습니까?

 

질투가 병리적이 되려면 개인이 소중히 지켜야 할 인연의 상대조차도 파괴해버릴 만큼의 강도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질투를 무의식적인 행동으로 나타내는 경우가 제일 흔합니다. 우리는 가족을 신뢰를 바탕으로 전적으로 내 편이 되어줄 만한 유일한 버팀목들로 여기고 살아가야 하는데 이 버팀목을 의도적으로 깨부수는 건 말이 안 되죠. 하지만 질투가 무의식의 영역에서 발현될 때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특히나 자기애성 인격장애를 가진 부모일 때 말이죠.

 

나르시시스트 엄마들은 자기가 직접 산통을 겪고 낳은 자식이고 공을 들여 먹고 입히고 공부시키며 그 누구보다도 좋은 엄마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이건 사회에서 가르치는 이상적인 어머니의 이미지인데 이걸 아무런 필터링 없이 자기 자신과 동일시해버립니다. 나르시시스트들은 자신의 객관적 평가가 전혀 안 됩니다. 임신을 한 직후부터 자신은 이 세상 최고의 엄마가 반드시 될 것이고 이게 안 될 경우 외부에 탓을 돌리면 그만입니다. 난 이미 훌륭한 엄마의 노릇을 다 하고 있는데 애가 이상하고, 남편이 무능력하고 선생들이 할 일을 제대로 안 하는 거죠.

 

이렇게 세월이 흘러 아이가 성인이 되면 나르시시스트 엄마에겐 견딜 수 없이 회한과 공허함이 옵니다. 내 인생을 다 저 아이에 쏟아부어 허송세월 한 거 같고(보통 자기 하고 싶은 거 다하면서 애는 학원 뺑뺑이 돌리고 나중엔 집에 방치하면서 키운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자기 성찰이 안 되죠.) 내가 입고 쓰고 즐길 거 다 남과 같은 자식에게 몰빵한거 같은 억울함이 듭니다. 아이가 성인이 되어 자립을 하게 되면 여태껏 내가 포기한 모든 것들을 다 못 돌려받을 거라는 생각에 두려움도 오게 되죠.


웃긴 것은 또 나르시시스트 본인이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은 세상 훌륭한 엄마이기도 하니까 자식에게는 평생 애프터서비스를 제공하겠다면서 자식 상대로 껍데기뿐만인 말을 입이 닳도록 합니다. 그러며 시집 장가갈 때 밑천을 만들게 사리에 밝은 자신이 월급을 더 불려 줄 테니 엄마에게 맡기라며 자식의 재물을 볼모로 잡는 형국이 생깁니다. 비슷한 예로 대학에 진학한 자녀가 알바로 돈을 벌어 취미 활동을 하거나, 맛집 탐방을 하거나 물건을 구입하는데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아이가 본인 스스로 뭔가를 사서 누리는 것을 아니꼬워하는 것도 있고 원래 이들에겐 자식은 자신의 소유물이기에 ‘저 돈이 내 돈인데’ 하는 생각도 어느 정도 깔려 있습니다.


이들에게 있어 내가 아닌 사람은 남과도 같습니다. 이런 남이 내게 가장 가까이 있고 행복한 모습을 보이면 사정없이 밟아 버리고 싶은 질투심이 올라오는 거죠. 자식도 이들에겐 남입니다. 둘 사이에 정서적 공감이나 교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으니까요. 자식을 자신의 세치혀로 조종하고 손바닥위에 올려 놓고 산다고 자신의 능력을 믿어 의심치 않기에 정작 자식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헤아릴 필요를 전혀 느끼질 않죠. 내가 이미 구워삶아서 이용해 먹을 수 있는데 얘가 뭘 좋아하고 뭘 하고 싶어하고 무슨 기분인지 그런걸 알아서 뭐하겠습니까? 그래서 자녀가 훗날 부모와 연락을 단절하게 되는 극단적인 상황이 되면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왜 그렇게 되었는지 전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황의 팩트만 나열하면 이건 헌신적인 엄마와 자식 간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지만 세상은 엄마라면 다 헌신적이어야 한다 그러는 데다가 엄마 본인도 그렇게 입을 털어대니 자녀가 인지부조화로 인한 혼란이 생길 수밖에요.

 

성인이 된 딸에게 엄마가 보이는 질투의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1. 연애를 시작한 젊은 여자로서의 딸에 대한 견제.

제가 자주 목격한 사례는 남자 친구를 동반한 식사자리에서 엄마가 딸에 대한 외모에 대한 비난을 하는 것입니다. 왜 요즘 이렇게 식탐이 많아졌냐, 몸매 흐트러진 거 다 보인다. 역시 아빠를 닮아서 목이 짧은 거 같네. 이런 멘트에서 주목할 점은 그냥 딸이 마냥 부러운 게 아니라 딸의 흠을 잡아서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는 점입니다. 자녀가 젊고 아름다움을 이성에게 어필해서 연애까지 성공하는 걸 보게 되면서 나르시시스트 엄마는 암컷 무리에서 자신이 도태될지도 모른다는 그런 날것의 위협을 느끼게 되고 그건 언어적 공격성으로 바로 발현됩니다. 딸이 성경험을 했다는 얘기를 하게 될 경우 엄마는 자신이 만난 대물에 대한 얘기를 늘어놓기도 합니다. 나르시시스트 엄마 아래 자라난 자녀들은 정신적인 질환에 쉽게 노출되어있습니다. 이렇기에 그들에게 연애는 사치일 경우가 많죠. 이 때문에 연애를 시도조차 안 하는 자녀를 상대로 나르시시스트 엄마는 자신의 남성편력을 이야기하면서 안 그래도 아픈 자녀를 더 깎아내리기도 합니다. 젊은 딸인 너에게 절대 질 수는 없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2. 엄마가 된 딸에 대한 견제.

딸이 자식을 낳고 ‘어진 어머니’의 역할을 맡는다는 것 또한 탐탁지 않습니다. 저희 외할머니 같은 경우 손녀인 저에겐 유난히 선물공세를 하셨습니다. 엄마는 어려서부터 외할머니에게 어린 나이 때부터 유령인간, 식솔 취급받았던 본인의 모습과 선물을 받고 좋아라 하는 어린 딸의 모습이 오버랩이 될 수밖에 없죠. 외할머니의 행동 또한 무의식적으로 나온 딸에 대한 견제입니다. 딸과 손녀 사이에 이렇게 이간질을 시켜 놓아서 딸이 엄마 역할을 수월하게 하지 못하게 훼방을 놓는 거죠. 외할머니는 이외에도 자식인 엄마에게 전기 수돗물 낭비를 다 큰 어른이 왜 하냐면서 손녀가 보는 앞에서 엄마를 타박하고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셨습니다.

 

3. 여자로서 딸에 대한 견제.

이건 1번과는 달리 아주 위험한 부류인데요. 실제로 엄마들이 딸의 교제 상대를 유혹하는 듯한 뉘앙스의 행동들을 합니다. 특히 영국 같은 곳에선 흔하게 리얼리티의 소재가 되기도 하고 타블로이드지에서도 자주 나옵니다. 제가 유튜브 구독하는 나르시시즘 학대를 극복한 라이프 코치분은 자신의 엄마를 집에 초대하자 샤워를 하겠다며 샤워를 한 후 수건을 대충 몸에 두르고선 사위가 쉬고 있는 안방(문이 살짝 열려있었다고) 문 앞을 이리저리 서성 거리는 것을 목격한 것에 대해서 에피소드를 낸 적이 있죠.

 

4. 사회성이나 지식을 키우려는 자식에 대한 견제.

이는 부모가 자신이 못 누려본 교육 혜택 같은 것을 자녀가 받음으로써 본인이 받는 상대적 박탈감, 머리가 큰 자녀의 독립으로 인해 자신을 우러러 봐줄 사람이 없어질 꺼란 두려움, 교육에 들어가는 돈을 왜 자신에게 써야지 자녀에게 양보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억울함 이런 감정들이 다 섞여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녀가 마냥 자기 눈치 잘 보면서 마냥 우러러 봐주길 바라는 마음 또한 자신의 밑 빠진 독 같은 자존감을 채워 주는 수단으로 자신의 자녀를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변명뿐인 말, 실천하지도 않을 약속 이런 것에 얽매이시지 마세요. 상황을 그 상황 그대로 놓고, 결과물을 위주로 보는 것이 나르시시스트가 자식에게 하는 학대를 자각하는 최고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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