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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개 Feb 07. 2022

자아와 정체성

소셜 미디어를 보면 자아에 대한 무지함을 상쇄시키기 위해 의미도 없는 자기 정체성 꾸미기에 온 힘을 바치는 이들을 자주 접한다. CPTSD를 가지고 있는 나도 불온전한 자아를 상쇄시키기 위해 인생을 허비하고 좌절하기를 반복했기에 이는 나에게 절대 낯선 모습은 아니다. 그리고 정상적인 스펙트럼에 있는 이들도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삶의 고비마다 찾아오는 것이기 때문에 어쩌면 지극히 인간적인 것으로 치부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자신의 정체성을 바깥세상에 확인시키는 것에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그 노력이 무색할 만큼 정체성 확립에서 멀어져 간다는 점이다.


자아와 정체성, 나만의 정의를 내려 보자면


자아: 내가 나에 대해 어떻게 느끼며 생각하며 살아오면서 축적된 경험들로 인해 직감하는 나 자신에 대한 추상적 이미지. 이는 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으며 타인에게 표현을 하는데 큰 어려움이 있다. 자아에 대한 이미지는 본인의 기질과 트라우마의 유무 관계, 양육자의 태도 등으로 인해 성장하지 못하고 불온전하고 정체된 상태로 성인이 되는 경우도 많다. 개인적으로 이것이 기분장애나 인격장애의 아주 중요한 핵심 아닐까 생각한다.


정체성: 사회 공동체 안에서 타인과 나를 분류하거나 같이 엮을 수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의 조합으로 흔히들 문화, 정치적인 신념이라던지 공동체 안에서 내가 가진 지위나 역량, 지리적 위치로 인한 특정 문화나 언어구사 능력, 외모나 체형, 결혼과 교제와 같은 관계 상태. 이런 요소들은 모두 관련된 용어나 수치들이 있기 때문에 타인에게 표현하기 제일 쉽다.   

개인의 정체성은 상당한 부분이 태어날 때부터 정해 지거나 양육 환경에 의해 자연스럽게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듯 생긴다. 이 정체성이란 개념은 모호한데 심지어 부모가 어려서부터 '너는 온순한 아이야'라고 단언하는 거 조차도 내 외부 정체성에 포함이 된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알리려고 동분서주하는 이들이 간과하는 사실이 하나 있다면 죽었다 깨어 나도 나는  자신을   없다는 것이다. 개인의 능력 안에선 자아도   없을뿐더러 개인의 정체성 조차도 이해할  없다. 내가  자아 모르는 이유는 내면의 감정까지 부정하게 만드는 자아의 불온전성, 그리고 추상적 멘털 이미지라는 , 무의식 속에 박제된 경험들 때문이고 정체성 그야말로 남의 관점에서 보는 '몸뚱이뿐인 모습'이기 때문에,  좁은 시야로썬 남이 나를 어떻게 분류하고 재단하는지 어떻게 상상하겠으며 이건 이해의 영역조차도 아닌 것이다.


 문단에 정체성 꾸밈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했었다. 내가 아무리  정체성을 모든 사람의 구미를 맞추기 위해, 혹은 모든 사람보다  특출  보이기 위해 꾸며 봤자 결국 남들은 나에 대한 평가를 제멋대로  것이기 때문이다. 정체성이란 남들에게 자유를 주는것이다.


막말로 내일 내가 죽어도  깜짝   그런 사람들에게 괜히 칭찬과 관심을 유도해놓고선  있다가는  맘이 변해서 견제하고 시기 질투를 하질 않나, 상대방은 알아채지도 못할 기싸움에 신경전을 자기 혼자 벌이는 것도 모자라 혼자서  치고 장구치고 이미 대하사극 분량의 감정 기복이 하루새  지나간다. 그들에게 있어 남들에게 잊혀진다는  무엇이길래, 그저 그런 남의 눈에 치이는 존재로 사는  뭐가 어떻길래.    


어린 시절 정서적 학대뿐만 아니라 부모와 애착관계가  성립되지 않는 환경에서 크면 자아가 분열한 채로 자라게 되는데 자아 안에서 '아이스러움' 담당하는 면은 트라우마를 당한  시기  모습으로 영원히 박제가 된다. 흔히들 자아에서 '아이스러움'이란 놀이나 재미를  모습, 인간과의 관계 내에서 모든 빗장을 열고 상대방에게 유약한 모습도 보여줄  있는 순진함 등이 있다. 무언가를 좋아하고 즐기고, 쫒고 그로 인해 만족감을 느끼는 행위들이 훗날 자아실현에  디딤돌이 되고 더욱 나아가  정체성 또한 견고히 다져가게 되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 트라우마를 겪으면 이 시기 자신이 주로 쫒고 관심을 보였던 것들을 본인이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기억하게 된다. 하라는 데로 다 했는데 비극이 일어났다는 건 논리적으로 이해가 안 되니까. 하지 말라는 것을 해서 내가 그 죄를 받았다라며 자신을 자책하는 것이다. 극단적인 상황을 꼽자면 사탕을 좋아해서 사탕 주는 사람을 따라갔다가 험한 일을 당했다거나 무엇을 사달라고 엄마한테 떼를 쓰던 날 부모 중 한 명이 집을 나갔다 등등. 이런 아이다움은 묵살된 채로 그렇게 어른이 된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즐기는지를 되뇔수록 과거의 트라우마가 재생되기 때문에 취미는 그들에게 금기 사항이다.


성인이 되면 공동체 나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미성숙하고 상처받은 자아 사이 엄청난 괴리에 심적으로 압도당한다. 이를 경계선 인격장애 환자들이 겪는 identity disturbance라고 한다.  그들은 죽음과 같이 드리우는 트라우마의 그늘, 끝이 보이지 않는 고립을 느끼고 이것을 상쇄하기 위해 외면적 정체성 꾸미기에 몰입하기 시작한다. 내 자신이 없어지는 느낌. 이는 버려질 것에 대한 두려움과 일정 부분 연관이 있긴 하지만 단독적인 개념이다.


그들은 커가면서 그저 사람들 무리에 끼기 위해 취미를 갈아 치우기 시작하고 관심도 없는 분야에 통달한 척하고 취향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특정 체형이나 스타일링을 고수하는 뼈를 깎는 노력에, 지속적인 이성(동성) 교제를 통해 상대방의 정체성을 내 정체성으로 귀속시키려는 시도, 성 정체성, 별자리, MBTI 등등 나를 소위 축약해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유사과학/유행들을 총동원하게 된다. 애석하게도 이런 것들은 내면의 불온전함을 잠재우기 위한 긴급 조치들이기 때문에 나를 표현하는 미사여구들이 늘면 늘어날수록 의도 없이 덕지덕지 붙인 꼴라쥬 같아져 버린다.


CPTSD만 놓고 봤을 때 이런 행동 패턴은 CPTSD에 나타나는 특징은 아니다. 일단 경계선 인격장애 같은 경우 자신이 자신을 보는 관점이 비관적이다가도 긍정적으로 돌변하는 그런 들쭉날쭉하는 성향이 있는 반면에 CPTSD는 자신을 보는 관점이 그냥 확고하게 비관적이다. 그렇기에 자기 자신에 심취하는 경험 자체가 거의 없고 자신이 하는 모든 행위나 성과들에 대한 평가를 그렇게 후하게 내리지도 않기에 굳이 밖에 드러낼 이유를 못 찾는다. 일단 사회적 고립의 기간이 워낙 길기 때문에 고립감을 느끼는 위기적인 상황일수록 더더욱 사람에게 매달리는 경계선적인 특성을 안 보인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은 세월이 지나면서 차츰 변화한다. 이상적이라면 자아도 성장하고  정체성도 그에 맞게 변화하겠지. 하지만 내면 속의 안정이야 말로 개인이 삶의 고난에서 얻을  있는 유일한 보석이고,  자신을 관통하는 이미지이며 키워드이다. 알지도 못하는 관중들의 눈을 의식하며 무대 위에 올라가 연설할  자신에 대한 소개 멘트를 백번  번을 다듬어 봤자  행동에서 우러나는  자신에 대한 만족을 대체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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