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왕따 (3)
중학교 시절이 나에게 상처로 남았다면, 고등학교 생활은 비교적 개선되었다. 일단 해외에서 살다 한국에 온 학생들이 중학교 때보다 많았다. 또한 한국어와 별개인 언어를 잘하는 게 더 이상 창피하고 숨길 일이 아니었고, 내 언어적 능력을 존중해줄 뿐만 아니라 나란 사람 자체를 친구로 받아준 이들이 생겼다.
물론, 그 당시 외고는 지역 내 중학교에서 공부를 잘했던 사람 위주로 선발했기에, 학생들은 성적에 더욱 민감했다. 그로 인해 몇몇 학생들이 학교 영어 시험 때문에 나를 날카롭게 대하는 일은 여전히 있었다. 가령 기말고사 기간 중 영어 시험 문제 정답을 설명해달라고 학생들이 물어보면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명쾌한 대답을 해줄 수 없었다. 해주기 싫어서가 절대 아니다. 영어 문법에 대한 공부를 한국어로 한 적이 없어 설명 방법도 모르는데, 이를 학생들이 오해해 나에게 모진 말을 한 적도 있었다.
"넌 너만 성적 잘 받으면 다야? 얘는 우리한테 그냥 알려주기 싫은가 봐."
이런 껄끄러운 순간은 간혹 있었지만, 중학교 때와 비교 시 이젠 어쩌다 한 번씩 일어나는 일이었고, 위와 같은 학생보다 나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친구들 덕분에 난 학교 방송반 객원으로 영어방송이라는 것도 처음으로 하게 되었고, 동아리도 가입해 학교에 더 큰 소속감도 생겼다. 심지어 학교 대표 팀원으로 선발돼 텔레비전에 나오는 퀴즈쇼에도 출전했다.
하지만 교우 문제가 크게 없다고 해서 모든 게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비단 나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한국의 고등학생이라면 대학교 입시라는 거대한 문턱을 넘어야 하는데, 나는 이걸 어떻게 헤쳐나갈지 상의할 사람도 마땅치 않았고 학교 선생들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되려 동네에서 오래 다녔던 학원 원장이 조언을 더 잘해줬다. 중학교 졸업 당시 반에서 10등 안에 들었던 나는 내신 성적이 외고에서 평균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고등학교 입시 때 경험을 토대로 영어 실력을 내세워 대학교를 가리라 맘먹었다.
사람들은 "미국에서 살다왔으니까 당연히 영어를 잘하겠지"라는 오해를 흔히들 한다. 언어 실력에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지만, 악기 연습을 하지 않으면 실력이 녹슬듯이, 언어도 마찬가지다. 10년, 15년 넘게 해외생활 후 한국에서 영어 등 언어를 유지 못해 녹슬어버린 사람 내 주변에 여럿 있다. 많은 사람이 내게 그동안 영어를 어떻게 공부했냐고 물어보는데 '연습'외엔 별 다른 게 없다. 허무한 대답일지 몰라도 최소한 나에겐 그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엔 한국어, 영어 둘 다 연습하고 있다.
미국에서 귀국한 지 3년 정도 넘은 시점에서 고등학교를 입학하게 되었는데 언어 실력 유지나 공부를 위해 우리 가족은 고액 과외를 붙여줄 경제적 능력이 되거나 그런 걸 찾는 방법조차 알지도 못했다. 부모님은 중학교 이후로 공부나 진로 관해서 내 의견을 존중해 강제로 뭘 시키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공부나 그에 대한 방법을 찾는 건 오로지 내 몫이었다. 쌓아온 영어 실력 퇴화를 우려해 동생과 집에서 영어로 대화하려 노력을 많이 했고, 책이나 영상물 습득은 물론, 학교 공부와 더불어 영어 문제집을 굉장히 많이 풀었다.
나는 그 당시 수능을 보지 않고도 대학을 들어갈 수 있는 수시입학제도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특정 언어 우수자로 수시 합격하려면 표준 시험 성적은 필수였는데, 그중에 토플 시험 성적은 무조건 있어야 했다. 하지만 토플은 시험 비용이 높아 1년에 한두 번 밖에 보지 못했다. 볼 때마다 시간과 비용이 아깝지 않게 모의 문제집을 계속 풀었던 게 도움이 많이 됐다. 나는 직접 풀어볼 수 있는 문제가 최대한 많은 책을 선호했고, 한국어로 된 해설은 읽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해 문제보다 풀이가 많은 문제집은 되도록이면 피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내가 관심 있는 대학교가 개최하는 전국 영어경시대회라면 웬만한 건 다 지원했다. 내가 겨냥하고 있던 수시 1학기 특례입학을 하려면 최대한 빨리, 좋은 성적을 거두어 대학 지원서를 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고려대학교, 한국어외국어대학교, 성균관대학교 등에서 개최한 전국 영어경시대회에서 난 모두 입상했다. 표준 시험성적, 수상경력, 에세이 등을 포함해 대학 지원서를 써서 냈고, 입학 면접도 봤다. 그 긴 여정 끝에 드디어 수시합격 통지를 받았다. 이와 별개로 내가 학교 외부 시상을 많이 한 점 덕분에 고등학교 졸업식 때 특별공로상도 수여받았다.
여기서 조금 흥미로운 사실은 나는 지원했던 대학교 중 유일하게 경시대회를 개최하지 않았거나 내가 참가하지 않았던 이화여자대학교에 입학하게 됐다는 점. 글을 쓰기 좋아했던 나는 언론홍보영상학과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하기로 약속했다.
난 대학 입시를 위해 주어진 자원을 모두 활용해 최선을 다 했다. 부모님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가능한 지원은 마다하지 않았다. 우리 엄마는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에 내가 각종 경시대회를 보러 들어가 끝나고 나올 때까지 지루한 시간을 홀로 몇 날 며칠 견디셨다.
사실 엄마는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다른 학부모들과 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내가 학교 성적이 별로라 담임한테 무시당했던 적도 있었다. 우리 엄마를 제외한 다른 엄마들에게 살갑게 굴던 그 선생은 졸업 후에도 몇 번 만났지만 그분은 기억도 못하는 눈치였다. 내가 대학 합격 통지서를 받았을 때 기뻐했던 엄마의 모습을 기억하면 그때까지 그녀가 혼자 견뎠을 서러움과 걱정이 굉장히 컸던 것 같다.
이런 경험에서 비롯된 죄송함과 감사함이 누적돼 나는 대학 합격 직후 경제적 자립을 위해 돈을 벌기 시작했다. 그 순간부터 나는 지금까지 일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