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순간들에 돈을 쓰는 게 인생이다
지난 주말, 조금 이른 여름 가족 휴가를 다녀왔다. 평창, 강릉, 영월, 그리고 제천을 여행했다. 3대가 함께 한 또 하나의 여행 이야기 그리고, 여행하며 틈틈이 했던 혼자만의 사유를 다듬어본다.
금요일, 첫날은 평창역 인근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리조트로 이동해서 숙소에서 휴식을 취했다. 토요일, 여행 2일 차에는 가장 먼저 평창 오대산 내에 위치한 월정사로 향했다. 숲길을 걷고, 절을 올리고, 사찰 안에서 국보인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을 바라보았다. 정말 구 층이 맞는지 손으로 세려 보기도 하고, 바람이 불어올 때는 석탑에 주렁주렁 달린 풍경 소리에 집중했다. 잠시 한 곳에 머무르면서 소음 속 고요함을 느꼈다.
할머니는 "덕분에 여기를 와보네. 한 번쯤 다시 와보고 싶었었는 데, 고마워."라고 말씀하셨다. 따뜻한 그 한마디에 마음이 몽글해졌다. 그리고, 평소 고맙다는 표현을 서슴없이 해주는 막냇동생이 나란히 있었다. 길을 걸으며, '고맙다고 말할 수 있는 삶'에 대해 생각했다. 나 또한 고마운 사람에게 마음껏 표현하며 살겠다고 다짐했다.
점심은 축협대관령한우타운에서 소고기를 먹었다. 그리고는 근처에 대관령양떼목장이 있어서 잠시 들렀다. 햇볕을 이겨내고 언덕 끝까지 올랐더니 어느샌가 바람이 불어왔다. 덕지덕지 양 떼들이 풀을 뜯어먹고 있었다. 탁 트인 시야에 흰색, 하늘색, 그리고 초록색이 채워졌다. 평소 눈에 담을 수 없는 풍경을, 그런 자연을 감상했다. 일상이 무채색이라서 여행을 하는 건가 보다.
땀을 흘렸지만, 강원도 하면 떠오르는 '양떼 목장' 여행의 낭만을 챙겼다. 그리고는 강릉으로 이동했다. 안목해변에 들러서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하고, 경포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가족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는 근처 식당에 저녁을 먹으러 갔다.
최근 방송인 이영자 님이 방문한 식당이었다. 대게가 유명하지만 우리 가족은 모둠회를 주문했다. 모둠회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오늘만 날이 아니라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바다를 보며 대게를 먹는 삶'은 아직 멀었나 보다.
가격을 곱씹으며 식사를 해서 그런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결국 한 생각에 이르렀다.
한 끼에 가격이 얼마든지 간에, 식사를 하는 건 '순간'이다. 순간이라는 게 돈이 아까울 수 있지만, 우리는 어쩌면 그 순간을 위해 돈을 벌고, 사랑하고, 살아가는 건 아닐까. 그리고, 모든 건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자 그제야 가벼워졌다. 함께 하고 있는 식사 자리가 소중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여행은 그런 순간을 보다 잘 느끼게 해 준다. 순간이 소중하다고 느끼는 건, 그만큼 그 순간이 행복하다는 것과 다름없는 것 같다. 순간순간들에 돈을 쓰는 게 인생이고, 그런 좋은 순간들을 위해 나머지의 시간을 살아가는 거다.
저녁을 먹고 나와서는 밤바다를 조용히 걸었다. 고요함을 뚫고 소리가 들려서 돌아가는 길에 뒤돌아 봤더니, 불꽃놀이를 시작한 사람들이 보였다. 사진으로 '순간'을 열심히 담았다. 모든 건 순간이라는 오늘의 깨달음이 다시 한번 빛났다.
숙소로 들어와서 간단하게 야식을 먹고,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서 할머니와 함께 족욕을 했다. 이 또한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순간이기에 소중하게 느껴졌다. 여행의 마지막 밤이 애틋하게 흘렀다.
일요일, 여행 마지막날은 영월로 향했다. 차에서 잠시 자다가 눈을 떠보니 '영월 장릉'에 도착해 있었다. 부모님이 즉흥적으로 선택한 여행지, 입구에 놓인 관광 팜플렛을 보고 이곳이 '단종의 릉'이 있는 곳임을 알았다. 가장 먼저 단종 역사관에 들어가서 단종의 일대기를 둘러보았다.
조선의 6대 왕 단종은 문종이 즉위 2년 만에 승하하면서 12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할아버지 세종, 아버지 문종에 이어 정통성의 왕위를 물려받았으나, 삼촌 수양대군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단종은 측근들의 숙청을 막기 위해 결국 왕위를 넘겨주었다. 단종은 17살의 나이에 강등당하고, 궁에서 쫓겨나 영월로 유배 보내졌고 끝끝내 이른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였다.
조선왕릉은 모두 서울 경기지역에 조성되었는 데, 단종의 무덤만이 유일하게 강원도에 위치하고 있다. 숙종 때 이르러 단종은 복위되어 무덤은 왕릉으로 조성되었고, 능호는 '장릉'이다.
산길을 따라 올라가서 정릉을 마주했다. 가까이 가서 설명이 적힌 안내판을 보면서 형태를 보았다. 무덤의 양옆과 뒤쪽으로는 담을 두르고, 무덤을 지키는 돌기둥이 세워져 있다. 그 아래 양측에는 문관 모양의 돌인 문석인과 석마가 한 쌍씩 있다.
왕릉의 모습을 이렇게 자세히 살펴본 경험은 처음이었다. 국내의 조선왕릉들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사실도, 왕릉의 역사적 가치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장릉을 둘러보면서 그렇게 잠시 고요히 사유했다.
장릉 유적지를 둘러본 뒤, 점심 식사를 하고 돌아가는 길목에 마지막으로 제천에 들렀다. '의림지'에 있는 한 정자에 돗자리를 깔고, 디저트를 먹으며 휴식을 취했다. 불어오는 바람을 즐기면서 느긋하게 오후의 호수를 감상했다.
돌아가는 길목마다 소나무가 무성했다. 어떻게 저렇게 굳건할까 싶을 정도로 가지가 여러 갈래로 뻗어있었다. 기운을 본받고 싶어서 만져도 보고, 눈에 가득 담아냈다. 함께 여행 온 할머니, 할아버지도 굳건히 오래 사셨으면 좋겠다는, 그리고 어떤 일을 하더라도 스스로 견뎌낼 수 있길 바라며, 산책을 그리고 여행을 마무리했다.
이번 가족여행도 '잘 먹고, 잘 구경한 여행'이었다.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 여행하며 했던 사유를 돌아보니 생각과 감정도 그때의 '순간'이구나 싶은 마음이 든다. 인생이 왜 유한하다는 지 알 것 같다. 순간들이 유한하니깐, 그게 쌓인 게 인생이니깐 결국 우리는 순간을 살아가는 거니깐.
생각이 잘 정리된 지 모르겠지만, 이번 여행은 이런 생각들로 채워졌다. 생각이 계속 따라다녀서 때로는 갑갑했지만 그래도 이 또한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