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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령 Apr 16. 2024

다시 살게 됨

어떤 날 일기

병원을 나와 집 오는 길엔 아린 몸을 웅크리면 조금 덜 아플까 온통 몸을 감싸는 일에만 신경이 쏠려있었다. 하루 긴 잠을 자고

부활절을 맞아 나와 걸었다. 내 일상도 부활 같은 어떤 것을 좀 맞이해 볼까 하여.

도무지 다시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는데 몇 걸음 걸으니 며칠 소식이 없던 배꼽시계도 맞추어 울렸다. 간밤에는 배가 아파서 잠을 헤맸는데 배가 고프니 괴로움이 다 끝난 것 같았다.


차 속에서 웅크렸던 등은 길 위에선 펴지기 마련이라 오랜만인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며 걸었다. 내 발로 딛어 생기는 진동도 아직은 무리가 되어서 차근히 걸었다. 동네에 꽤 꽃 피는 구석이 많았다. 평소에는 우적우적 걷느라 생소하게 느껴지는 틈도 있었다. 바람은 좀 찼는데 걸을 수 있다면 조금 더 걷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엔 밀린 카톡에 답장을 했다. 이제 정말 일상이 다시 시작되겠구나 짐작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시작되어 버렸다고, 다시 아무것도 모르겠는 틈으로 들어가야 된다고 생각했다.


같은 병실을 쓰는 언니가 유난히 엄살이 많았다. 언니라는 호칭을 쓰는 나를 보며 스스로 어른이 다 됐다 .. 느낄 정도로 나이차가 났다. 같은 수술을 받는 언니였는데 옆에서 자꾸 무섭다, 무섭다 말하니 덩달아 무서웠다. 애써 모른척하고 있던 마음을 소리로 들으니 마음에서 똑같이 생긴 글자를 굳이 굳이 찾아 발견하는 듯했다. 무서워도 어쩔 수 없었다. 가만히 있으면 다 지나가는 곳이니까. 들추지 않고, 되려 살짝 덮어두고. 마음을 내비치지 않고 누워있었다. 금방 다 지나갔다.


카톡 답장을 하며 조금 좌절했던 그 시점에 이 생각이 났다. 가만히 덮어둘 필요도 조금은 있다고 생각했던 침대 위의 시간이 생각이 났다. 다 알고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반드시 알아야 하는 어떤 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아 무서웠다.


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는 내가 늘 기로에 있는 사람이라고 단정을 지었다. 그전까지는 내가 늘 기로에 있는 건 아닌가-하고 쉼표를 또는 물음표를 붙여왔는데 왜인지 차 안에서는 그랬다.

나는 늘 기로에 있는 사람. 절충안 같은 사람인가? 그런 의미는 아니었다. 절충안은 분명히 나보다 훌륭한 차원에 있는 중간이고, 나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 같다. 뭐든 끝장은 못 보는 애매한 사람. 모르는 것도 아는 것도 아닌, 잘하는 것도 못 하는 것도 아닌

이전에는 삶을 무 자르듯 나눌 수 없다는 그럴듯한 이야기를 앞세웠는데 지금 와서 보니 나를 감추기 위해 괜히 갖다 붙인 말 같기도 하다. 그것이 아니라면 미안하다 과거의 나에게. 너무 무시해서


점심을 먹으면서 비현실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길게 나눈 주제는 아니었는데 집에 돌아와서는 그 단어가 맴돌았다.

오랜만에 침대 밖으로 나와 걷는 내가 목에서 도려낸 혹처럼 현실로부터 도려내져 있는 느낌이었는데, 그 사람 앞에서 나는 너무 현실이었다.

괜한 불안이. 도려낸 혹 자리에 앉은 것 같이. 답답했다. 나는 기로에 있는 사람.

상대성 앞에서의 좌절감이라고 애써 말하고 싶지는 않다. 가진 글재주가 적어 그 이상의 이야기를 적어두지 못하는데서 오는 좌절감이 배로는 선명하다.


돌아와서는 강아지를 한참 쓰다듬었다. 무척 좋아했다. 강아지를 쓰다듬는 것이 순간적인 스트레스와 긴장 완화에 효과가 있다는 걸 어디서 봤다. 강아지야 미안해. 분명 그 이유 때문에 강아지를 쓰다듬었던 건 아닌데 강아지가 알면 서운할 수 있겠다 생각했다. 집 오는 길에 어떤 교회에서 준 부활절 달걀을 깨, 살을 먹기 좋게 잘라줬다. 방귀 냄새가 나서 괜히 강아지한테 장난쳤다.


다들 또 시작을 맞이했다.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4월이 왔다. 겨울이 다 끝나고 봄이 시작됐고, 죽음이 끝나고 생명이 시작되는 부활절이 지나갔다. 퇴원을 하고 집에 돌아왔고, 병은 끝나고 일상의 시작이다. 분명히 모든 것이 시작을 말하는데 내 코는 자꾸 끝의 냄새만 맡는다. 어디서 나는 냄새인지도 잘 모르겠다. 누구한테 괜한 장난을 쳐야 하나


그렇지만 또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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