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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rys Nov 18. 2021

21세기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태생적 계급

[북리뷰] <Caste> by Isabel Wilkerson


미국에서 인종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냥 피부색에 따라 백인이 흑인을 차별 대우하는 그런 류로 단순화해서 해석하기엔 너무 복잡한 이슈다. 먼저 미국에서 인종은 사회, 경제적 지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피부색만 검은 게 아니라, 그들은 경제적으로는 더 궁핍하고, 사회적 지위도 하층부를 구성하는 경우가 많다.


<Caste: The Origins of Our Discontents>는 흑인 여성으로는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미국의 저널리스트 이사벨 윌커슨이 2020년 출판한 책이다. 검색해보니 아직까지 이 책은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은 듯하다. 저자인 윌커슨은 현재 미국 부통령인 카말라 해리스의 알마 마더(alma mater)인 하워드 대학교를 졸업했다. 하워드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흑인 대학이다.


뉴욕 타임즈를 비롯해 다수의 신문사에 글을 썼던 저자는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의미를 분석함으로 이 책을 시작하고 있다. 2016년 대통령 선거의 열기가 한참일 때, 브루클린에 사는 젊은 예술가는 나이 든 할머니의 식료품이 가득 담긴 봉지 드는 것을 도와주려다 오히려 봉변을 당하게 되었다. 할머니는 예술가에게 어느 후보에게 투표할 거냐면서, 그(도널드 트럼프)가 미국의 주권을 회복할 것이라고 매우 성난 어조로 말하며 그의 손길을 뿌리쳤다. 이 할머니의 피부 색깔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낯선 이의 친절을 받아들이고, 훈훈하게 흘러갈 수도 있었을 상황이 이렇게 미움과 대립으로까지 흘러가게 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부제에 쓰인 'discontents'라는 단어는 추상명사인 '불만족'이 아니라, '사회 불만족 계층'으로 해석해야 맞다. 따라서 책 제목은 <카스트: 우리 사회 불만족 계층의 기원>이다. 여기서 미국 사회의 불만족 계층은 두 말할 것 없이 흑인을 의미한다.


윌커슨은 흥미롭게도 인종 차별을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유사하다고 비교하고 있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두운 극장에서 아무 데나 앉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지정된 좌석을 찾아가 그 자리에 앉아야 하는 것처럼 카스트는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정해졌다'는 것이다. 상위 카스트 계층인 백인은 하위 카스트 계층인 흑인에게 그들의 자리는 이미 그렇게 정해졌기에 좋건 나쁘건 바꿀 수 없고, 그대로 현상유지하고 싶어 한다. 이사벨 윌커슨에 따르면, 인종주의(인종차별)는 생물학적 관점이 아닌 권력 유지의 장치이기 때문이다.


20세기에 존재했던 카스트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나찌 독일의 아리안 우월주의 그리고 미국의 흑인 차별 인종주의라고 저자는 기술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나찌는 미국의 흑인 차별 정책을 벤치마킹하였다고 한다. 나찌 독일은 2차 대전 패망 후, 히틀러는 자살하고 수많은 전범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그리고 나찌가 저지른 잘못을 거울삼아 동일한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고 역사 교과서에 나찌의 전횡을 싣는 등 정부적 차원의 노력이 보인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은 남북전쟁에서 북군이 승리한 후, 남부 연맹을 이끌던 제퍼슨 대통령과 장군 로버트 리는 감옥에 가기는커녕 자기 농장에서 편안한 여생을 살다 죽었다. 심지어 로버트 리는 한 대학의 총장직까지 맡았다고 한다. 또한 흑인은 1870년 투표권을 인정받고도 여러 가지 편법에 걸려 제대로 투표할 수도 없었다.(예를 들어, 투표권을 행사하기 위해선 할아버지가 투표한 이력이 있어야 된다는 일명 '할아버지 규정'. 노예 신분에서 갓 해방된 흑인의 할아버지가 투표했을 리가 없기 때문에 결국 흑인은 투표를 하지 말라는 법률 규정이나 마찬가지다)


이 책은 멀리는 노예 해방 선언 이전부터 불과 책 발간 얼마 전 최근까지 인종주의의 사례를 찾아 나열하고 있다. 이전 글에 흑인 린치의 역사에 대한 포스팅을 한 적이 있는데, 흑인을 린치하는 장면이 담긴 그림엽서를 친구나 친척에게 보내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너무 잔인해서 미국 우체국 청장이 금지할 정도였다. 1967년 연방 대법원이 다른 인종 간의 결혼이 합법적이라고 결정 내리기 전까지, 대다수의 주에서 백인과 흑인(라티노, 아시안)과의 결혼을 법으로 금지하였다. 하위 카스트가 상위 카스트로 넘어오지 못하게 막으려는 의도였다. 여행을 자주 하는 저자의 직업상 비행기 일등석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상위 카스트의 승객은 저자가 좌석을 찾지 못하고 헤맨다고 여겼울 뿐만 아니라, 캐빈 크루는 짐 올리는 것 또한 도와줄 생각도 안 하고 본체만 체 등한시했다고 한다.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45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미국 사회에서 상위 카스트와 하위 카스트의 골은 더 깊어져만 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점은 저자와 같은 고등 교육을 받은 흑인 여성이 뉴욕타임즈와 같은 권위 있는 뉴스 미디어에서 일하며 중상층 이상의 안정적인 생활을 누리면서도, 피부 색깔 때문에 집으로 하수도 수리하러 온 저학력의 백인 배관공한테 무시를 당한다는 거다. 저자는 MAGA 모자를 쓴 배관공(트럼프 지지자라는 걸 알 수 있다)의 무례한 태도를 참을 수 없었지만, 우연찮게 대화를 시작하게 된 이후 그의 태도가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 볼 일 끝나고 집을 나간 뒤에도 걱정되는 점이 있다며 다시 돌아와 점검해 줄 정도였다고 한다.


이는 백인 배관공이 상대를 하위 카스트에 속한 흑인 여성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이웃에 사는 나와 같은 사람임을 인식하고 마음을 열 때, 더 이상 그 사람을 하위 카스트에 속한 흑인 여성으로 대하지 않게 됨을 시사한다. 영어 표현에 'see eye to eye'라는 말이 있다. 서로 눈과 눈이 마주쳐야 뭔가 통하는 게 나온다는 의미다. 상대방을 카스트에 속한 개체가 아니라 눈높이를 맞추어 나와 같은 사람으로 본다면, 사회적 관습인 카스트는 희미해져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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